스물넷 되던 여름, 나는 태국의 북부 지역에 있었다. 청년 봉사단체인 태평양아시아협회 소속 단원으로 15명 정도의 청년들과 함께 방문한 거였다. 우리는 대나무로 엮은 숙소에 머물면서 낮에는 마을에 필요한 우물을 파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대여섯 살의 꼬맹이부터 아가씨 티가 제법 나는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조금은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모두들 물기를 머금은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애들에게 우리는 컴퓨터, 한국어, 태권도 같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은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는 소수였다. '넝'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둥근 얼굴에 까무잡잡하고 고운 피부를 가진 15살 소녀였다. 넝은 우리 숙소에 자주 놀러 왔다. 같이 스티커를 붙이며 다이어리를 꾸미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며 시간을 보냈다. 넝은 가끔씩 자기 머리를 빗어달라고 했다. 어깨선을 넘는 넝의 머릿결은 탐스럽고 부드러웠다. 살짝 오렌지빛이 감도는 숱이 많은 머리를 빗어주고 있으면 넝은 두 다리를 양팔로 끓어 안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넝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면서 이 아이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했다.
언니, 궁금한 게 있어.
넝의 머리를 한국식 댕기머리로 따주고 있는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레오 오빠 있잖아. 여자 친구 있어?
레오? 아마 없을 걸. 저번에 없다고 들었어.
나는 그녀가 미소 짓고 있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는 한국에서 같이 온 단원 남자애로 한국체대 태권도학과 1학년이었다. 작고 말랐지만 운동하는 친구라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레오라는 닉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서 온 것으로, 그 아이는 조각 같은 얼굴로 유명한 그 배우와 묘하게 닮은 데가 있었다.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민첩하고 선배들한테 싹싹했다. 잘 웃으면서도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레오를 모두가 좋아했다. 때문에, 넝이 5살 많은 레오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둥글고 거대한 태양 아래서 우리는 땀을 쏟으며 우물을 팠다. 땅파기가 그렇게 고된 일인 줄 몰랐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 속에서 남자애들은 벌게진 얼굴로 삽질을 하고, 여자애들은 머리에 수건을 둘러매고 돌과 흙을 날랐다. 저녁에는 식사를 마치고 지역주민과 다 같이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우리들 중에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나도 신앙에 기대서 산 때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한다는 의미로 같이 저녁 예배를 드렸다. 각자의 언어로 함께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어떤 경건함과 겸허한 소망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선하고 진지한 얼굴의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 말씀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예의에 찬 얼굴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각자의 언어는 달라도 찬송은 같이 부를 수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를 때면 나는 앞으로 살면서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훗날 어떤 색다른 경험을 한다 해도 태국의 북경 지역 산속에서 소수민족과 함께 찬송을 부르는 일은 이때뿐일 것 같았다.
예배가 끝나고 저녁 10시가 되면 전기를 내렸다. 딸각 스위치 한 번에 세계는 다른 세상이 되었다. 환한 도시의 밤과는 차원이 다르게 짙은 어둠이었다. 내 앞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풀벌레 소리는 한층 거세게 들려왔다.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가다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더듬더듬 바닥을 기며 문을 찾았다. 바깥으로 나오면 무수한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원래 하늘에는 저렇게 별이 많은 거구나, 나는 고개가 아플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박힌 별무더기에, 하늘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내 머리 위로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 밤하늘과 적막과 어둠이 좋았다. 별을 보다 지치면 내가 떠나온 도시인 서울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많은 별 아래 있어서인지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고, 시공이 바뀌는 느낌조차 들어 마치 나는 원래부터 그 산속에서 살아온 것만 같았다.
우물은 좀처럼 깊어지지 못했다. 군대도 가지 않은 젊은이들의 삽질로 물길을 뚫기에는 땅이 너무나 단단하고 커다란 돌도 많았다. 결국 물을 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우리는 물이 나오지 않는 우물을 앞에 두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멋쩍게 웃었고, 그들은 우리가 돌아간 후 마저 작업하겠다며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그리고 고생한 우리들을 위해 송별회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떠나기 하루 전, 아침부터 사람들은 종일 불 앞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한국의 전통음식을 준비했다. 미리 준비해 간 재료에 현지 재료를 동원해 불고기, 잡채, 수박화채 같은 음식을 했다. 한국에서는 자기 밥상도 잘 차려 먹지 않는 애들의 여물지 않은 손으로 한 음식들은 어딘가 조금씩 맛이 이상했다. 유일하게 맛있는 건 수박화채뿐인 듯했다. 음식 하는데 꼬박 하루를 보내고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잔치가 시작되었다. 흙뿐이었던 마당에 긴 테이블을 준비해 각자의 음식을 올려놓고, 나무마다 주홍색 조명을 달아놓으니 금세 그럴듯한 파티장이 되었다. 누군가 흥겨운 팝송을 틀어놓았다.
하얀 별이 잔뜩 박힌 밤하늘 아래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수박화채를 먹었다. 갖가지 음식냄새와 더불어 그동안의 피로와 이제 곧 돌아간다는 흥분과 긴장이 서로 섞여 떠다녔다.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넝이었다. 작은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는 나를 숙소 뒤 어두컴컴한 마당 한구석으로 데려갔다. 주홍 조명 아래 한 남자가 서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레오였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두고 넝은 레오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자기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말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말을 하려고 레오를 보니 여기까지는 이미 얘기가 오간 듯,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누나, 나 넝한테 편지 안 쓸 거야.
왜?
레오의 뜻밖의 대답에 왜라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넝이랑 사귈 것도 아닌데, 편지를 쓰면 안 되는 거잖아. 괜히 혼란만 주는 거잖아.
뭐지, 이 쓸데없는 단호함은. 말문이 막힌 나는 곁눈질로 넝을 살피며 복화술 하듯 말을 이었다.
누가 넝이랑 당장 사귀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좋은 펜팔친구 정도는 될 수 있잖아.
아니야. 넝이 나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그래. 그럴 수 없으니까 누나가 잘 말해줘.
레오의 결심은 굳건했다. 내가 눈을 부라리며 그냥 몇 번 써주라고 해도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 것 같아 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넝의 선하고 맑은 눈을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레오가 너랑 사귈 마음이 없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시작도 하지 말자고? 도저히 넝의 낯빛이 실망으로 바뀌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넝이 우리들의 표정을 못 보게 등지고 레오를 다시 설득했다. 편지 몇 번 한다고 결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편지 써주겠다고 하라고, 그러나 레오는 희망고문은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멋있는 건지 꽉 막힌 건지, 갑갑증이 올라온 나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마당을 빠져나오며 뒤돌아 보니 주홍 등 아래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넝과 레오의 옆모습이 그 와중에서도 너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위를 보니 여전히 풍요롭게 빛나는 밤하늘이 무거운 듯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이 밤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 아래에서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두 젊은이의 옅은 한숨과 긴장이 부유하던 밤, 깊어지지 않은 우물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각자의 말로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던 밤. 자신의 앞에 다가올 거대한 세월을 모른 채 말간 얼굴로 웃던 나와 또래들이 잔을 부딪치던 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밤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진출처 - way 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