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2학년 3월의 첫 불어수업, 교실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등장하자 우리들은 '와!'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 유명한, 김쌤이 등장하신 것이다. 샹송을 기가 막히게 부르고, 늘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입담으로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계신 김쌤. 우리 학교의 최고 스타.
오렌지브라운으로 밝게 염색한 파마머리의 그녀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떠오른 단어는 ‘fresh’였다. 열여덟 인 우리보다 열 살은 많았지만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어떤 신선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보통 선생님들의 이미지인, 점잖고, 다소 지쳐 보이며, 무섭거나, 아니면 인자해 보이는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손동작은 춤을 추기 위해 시동을 거려는 듯 무언가 리듬감이 느껴졌고, 발걸음은 '총총총'과 '사뿐사뿐' 그 어느 사이에 있는 듯했다. 그가 말하다가 갑자기 춤을 춘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은 리듬감이 몸 전체에 흐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우리들은 샹송을 불러달라고 졸랐다. 얼마나 잘 부르길래 그렇게 소문이 자자할까. 모두들 기대에 찬 눈으로 김쌤을 쳐다보았고 나 역시 숨 죽여 기다렸다. 누군가가 샹송을 내 앞에서 부르는 거 자체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쌤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프랑스의 대표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곡을 불렀다. 전체적으로 애잔한 느낌의 곡은 쌤의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발음이, 뭐랄까 아주 진하다고 할까. 성대를 긁는 것 같은 불어 특유의 발음을 쌤은 더 강하게 발성했는데 그래서인지 노래가 더 감미로운 듯하면서도 몸 어딘가가 간지러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은 탄성과 함께 교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반해 버렸다.
그렇게 강렬한 첫인상과 함께 1년간 김쌤 밑에서 불어수업을 받았다. 숨 막힐 거 같은 일상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김쌤은 본인의 화려했던 옛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주로 대학시절 얘기였다. H 대학을 다닌 김쌤은 전교에서 본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했다. 그야말로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다녔다는 그녀는 한쪽은 노란색 스타킹, 한쪽은 보라색 스타킹을 신는가 하면, 양쪽 색깔이 다른 하이힐도 즐겨 신었다고 한다. 엉덩이만 간신히 가린 미니스커트를 입고 교정을 활보하고 다녀 뭇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는 얘기, 뜨거웠던 연애 이야기, 요절복통 사건들로 가득 찬 MT 이야기 등등 화려하고 박력 넘쳤던 캠퍼스 생활에 우리들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곤 했다.
그 에피소드들 중 지금도 추석이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긴 추석 명절을 지내고 온 우리들은 수업시간도 때울 겸, 추석에 생긴 일을 들려달라고 선생님들한테 졸랐는데, 다들 비슷비슷한 명절 이야기 중에 역시 김쌤만이 독보적인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었다. 결혼하고 두 번째 추석을 맞은 그는 긴 명절 동안 양가를 오가며 빤하게 보낼 생각을 하니 너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거 같았다고 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고, 비행기표를 알아보니 마침 태국행 표가 있어, 그 길로 홀로 짐을 싸서 명절 내내 태국에서 보내고 온 길이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 멋지다!" 아이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박수를 치며 신나 했다(그 당시는 멋지게 들렸지만, 결혼하고 보니, 올케나 동서가 그런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법한 에피소드이다).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당당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김쌤. 어디서나 샹송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김쌤. 여러 면에서 나는 그녀와 다른 성향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고, 그저 성실하고 착한 거 빼곤 시체였던, 단발머리 수줍은 여고생. 이런 나의 껍데기를 깨고 김쌤처럼 박수와 환호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김쌤처럼 멋진 학창 시절을 보내리라 다짐은 했지만 꼭 같은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결심까지 한 것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1년 후 나는 쌤과 같은 H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그녀의 후배가 된 것이다. 당시 입학전형 대로 세 군데에 원서를 넣고 두 군데에서 합격소식을 받았는데 다른 한 곳은 여대로, 졸업하면 교육심리와 관련된 교사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가 될 수 있는 여대로 진학할 것을 권했지만, 막 스무 살이 된 나에게 '안정적'이라는 말은 그리 끌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대를 다니면 여고시절과 비슷하게 답답한 학창 시절을 반복하게 될 것 같았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H대에 들어갔다. 나의 롤모델인 김쌤을 생각하며.
그래서 나는 그녀처럼 화려한 대학생활을 보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과대표를 하며 인생 반전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지냈지만 그 생활도 2학년 때까지이고, 3, 4학년이 되자, 고등학생 때처럼 도서관과 강의실만 왔다 갔다 하며 조용하고 건조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막상 주목받고 여러 사람이 찾는 위치에 서보니 그것이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박수 치고 웃어주지만 뒤에서는 다른 말을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것들을 훌훌 털어낼 줄 알아야 하는데 나란 사람은 속상함과 괴로움에 잠을 못 이루는 성향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관객석에 앉아 누군가의 아름다운 노래를 음미하는 게 더 맞는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이던가. 김쌤을 한번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찬양하던 프랑스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다큐를 상영하던 영화관에서였다. 김쌤이 저 가수를 정말 사랑했지 하며 그녀를 떠올렸는데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거짓말 같이 맨 앞줄에서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뒷줄에 앉았던 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쪽으로 달려 나가 보았지만 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후로 또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종종 그를 떠올렸다. 추석 명절이 시작되기 전, 멀고 먼 시댁에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태국으로 훌쩍 떠났다던 그녀가 생각났다. 아이들 반찬을 위해 콩나물을 다듬을 때도 그녀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아무리 공부 많이 하고 잘났어도 결혼하면 콩나물 다듬는 신세더라." 고교 졸업하고 몇 년 후에 김쌤이 이혼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타깝기보다는 훨훨 자유롭게 사는 솔로의 삶이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생의 롤모델에 이렇게 근접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싶다. 그녀처럼 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인생, 성격 조금도 겹치는 면이 없다. 롤모델로 삼았던 김쌤은 다시 태어나야 가능한, 현생의 나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심지어 H대학에 들어간 것 마저 후회하고 있다. 삼십 대 중반부터 내가 교육심리 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사라는 직업도 지금은 해보고 싶은 일중의 하나이다. 어른들이 강조했던 안정적인 이유보다, 교육이라는 분야 자체에 관심이 깊어졌다. 지금의 깨달음을 얻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H 대를 버리고 교육심리를 선택할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살아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진정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에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라도 받게 되려면 일단 살면서 뭐라도 겪어봐야 한다. 김쌤 같이 살겠다며 이년 간 좌충우돌 이런저런 일을 겪어본 경험 덕에 나에게 맞지 않는 역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수십 차례 입어본 끝에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색인지 차차 알게 되었다. 문제라면 너무 늦게 알고 깨닫게 되어 그때 움직이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는 상황이 된 것.
내가 그랬던 경험을 잊지 않고 우리 아이들은 진정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을 때까지 여유 있는 마음으로 내가 기다려 줄 수 있기를, 하지만 이왕이면 너무 늦지 않게 찾게 되기를 콩나물을 다듬으며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