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웃
열다섯 살이었을 때 우리 집은 마당에 목련 나무 한 그루가있는 2층 집이었다. 지붕이 초록색이었고, 내 방은 2층에 있었다. 나는 종종 초록 지붕에 사는 '빨간 머리 앤'으로 빙의해, 창문에 턱을 괴고 동네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목련이 다 떨어지던 4월의 어느 날, 이삿짐 트럭이 우리 집 앞에 서는 모습이 보였다. 트럭에서 한 아주머니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내리더니 우리 집으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 집 안뜰에는 주방과 화장실이 딸린 별채가 있었는데 그쪽으로 세 들어오는 가족인 듯했다. 엄마가 나랑 동갑인 남자애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 애인 듯했다. 착 달라붙는 바가지 머리 스타일에 동그란 얼굴, 갸름한 눈을 가진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내 스타일은 아니네.' 2층에서 한참을 내려다보던 나는 중얼거렸다.
“너 재랑 커플이야?” 특활시간, 옆자리의 친구가 장난기 어린 말로 뒤를 보라며 눈짓을 했다. “뭔 소리야?”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교실 맨 뒤에 앉은 남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세 들어온 아이 현수였다. “아, 쟤. 우리 집에..” 나는 그 애에 대해 말하려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현수는 나와 같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빨간색 바둑판 무늬 셔츠, 나와 달리 가슴에 주머니가 달린 것만 빼고는 거의 똑같다. 나는 특활 수업으로 전통매듭반을 선택했었는데; 현수도 그 수업에 들어와 있었다. 전통매듭반은 남자애들은 잘 들어오지 않는 반이다. 아마 4월에 전학 온 상황에서 남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수업은 이미 자리가 다 찼기 때문인 것 같았다. 흘깃흘깃 쳐다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얼굴 고개를 돌리고 매듭을 만드는 척했다.
이미 그 애랑 나는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집 현관문에서 수시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숫기가 좋았다면 “너는 몇 반이야?”라며 말이라도 텄을 텐데, 그 아이도 나도 그런 과가 아니었다. 학교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복도나 운동장에서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만 투명인간인 듯 서로 안 보이는 척했다. 그 애도 나처럼 옷이 없었는지 바둑판 무늬 셔츠를 자주 입었고, 같은 옷을 입은 날은 더더욱 서로를 못 본 척했다.
'은근 신경 쓰이네.' 여자애였으면 이렇게나 내외하며 모른 척 지내지는 않았을 텐데 싶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쌩하게 서로를 외면하며 지내는 게 힘든 건 아니었지만 뭔지 모르게 불편한,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렇게 계절이 두 번 바뀌어 겨울이 시작되려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진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낑낑거렸다. 진돌이는 지난여름에 엄마가 할아버지한테서 얻어온 진돗개였다. 태어난 지 여섯 달 밖에 안 된 꼬맹이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우리 진돌이 산책 나가고 싶구나.” 마침 학원 수업도 없는 날이라 뒷산 약수터로 산책 겸 길을 나섰다. 가지고 온 물통에 물을 받고 있는 동안 진돌이는 신나게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숨바꼭질 좀 해볼까?' 큰 나무 뒤에 살짝 몸을 숨기고 진돌이의 동태를 살폈다. 냄새 맡기에 열중하던 진돌이가 문득 내 생각이 났는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컹컹” 진돌이는 약수터를 향해 몇 번 짖더니 내가 숨어있던 나무 앞을 빠르게 지나 산 아래로 달려갔다. '잉? 뭐야. 내 냄새를 모르는 거야?' 이 어설픈 녀석, 나무 뒤에서 나와 진돌이를 불렀다. “나 여기 있어~”
진돌이가 달려갔던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도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돌아! 진돌아!”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진돌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집으로 갔나?' 집으로 가려면 큰 찻길을 건너야 하는데 차에라도 치였으면 어쩌나 싶어 찻길까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찻길에 도착하자마자 핏자국이나 사고흔적이 없나부터 봤다. 다행히 별다른 사고는 없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뛰어갔지만 집 마당에도 진돌이는 없었다.
망연자실 서있는데 마침 현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 오다가 우리 진돌이 못 봤어?” 그 애한테 처음 건네는 말이었다. 현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수터에 갔다가 잃어버렸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며 나는 울먹였다. 현수는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찾아야 할 것 같다고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진돌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현수와 나는 진돌이 이름을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진돌이가 큰 길이 무서워서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했을지도 몰라” 동네를 한 바퀴 돈 현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약수터 주변을 다시 찾아보겠다며 달려가고, 나는 예전에 진돌이와 몇 번 가봤던 놀이터로 뛰었다. 하지만 놀이터에도 진돌이는 없었다. 해가 지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찾을 시간이 되었다. 이젠 진돌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려야 할 거 같았다. 진돌이를 유난히 아끼는 막내와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슬픈 날 눈이라니…‘
”어? 진돌아!“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에서 진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았다. “어디 있었어? 이놈아!” 진돌이를 안고 얼굴을 비볐다. “산 아래에 큰 갈비탕 집 있잖아. 거기 마당에 있더라고.” 어느새 현수가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아, 거기 있었구나. 고기 냄새 맡고 갔나 보다.” 약수터로 뛰어가던 현수의 뒷모습이 떠오르면서 고마운 마음이 뜨겁게 차올랐다. “고마워.” 현수는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흰 눈 속에 자기 집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날 이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현수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가벼운 인사라도 하며 지낼 참이었는데, 며칠을 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현수를 본 게 특활 매듭반 시간이었다. 친구들도 있는데 새삼 가서 인사하기도 어색하고 우리는 예전처럼 또 모르는 척 앉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인사할 순간을 놓치고 전처럼 지내게 되니 예전보다 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그 애한테 빚을 진 것만 같았다. 점점 현수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교할 때면 현수와 마주칠까 싶어 빨리 대문을 나서고, 학교에서 그 애가 저 멀리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가고는 했다. 어쩐지 내가 못난 거 같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마당의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날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니 집 앞에 파란 트럭 한 대가 서 있고, 현수 어머니와 바둑판 무늬 셔츠를 입은 현수가 짐을 올리고 있었다. 현수는 나를 보더니 다가왔다. “나 이사가. 엄마가 직장을 옮기시게 됐어.” “아 그렇구나. 그럼 전학 가겠네.” 느닷없는 소식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저기, 너한테 줄 게 있는데...” 현수는 셔츠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곰돌이 문양의 포장지로 싼 작은 상자였다. “고... 고마워.”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럼 나 갈게. 잘 지내.” 현수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다가 곧 엄마와 이삿짐 트럭을 타고 떠났다.
방으로 돌아와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상자 안에 담긴 건 전통매듭법으로 만든 붉은 끈의 팔찌였다. 그리고 작은 쪽지가 접혀 있었다. 궁금한 마음으로 쪽지를 펼쳤다. 현수의 단정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팔찌 매듭법 배울 때 선생님이 좋아하는 사람한테 선물하라고 하셨잖아. 그때 너 생각이 났어. 이사 가면 연락할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흰 목련이 그날 밤의 눈송이처럼 창밖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