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기로 해요
맞은편 의자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한참 전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나는 더더욱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려 애쓴다. 왜 쳐다보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인 나는 할머니의 시선을 외면하기로 한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전,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방사선 치료란, 암세포에 방사선을 조사하여 암세포를 죽이고, 암세포가 주변으로 증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암 치료 방법이다. 횟수가 거듭되어도, 매번 긴장이 되고, 내가 암환자임이 다시 한번 각인이 되는 시간. 그래서 방사선 대기실은 항상 정적이 흐른다. 핸드폰을 보거나,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거나, 감정을 읽기 어려운 무표정이 되어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항암 치료하고 왔어요?”
이 무거운 정적을, 할머니는 기어코 깨버린다. 큰 소리로 맞은편 의자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뽑고 작은 밴드를 팔뚝에 붙이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내가 항암주사를 맞고 왔나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피 뽑고 온 거예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대기실 티브이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암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기 전, 나는 방사선 치료를 31회 받아야 했다. 뱃속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그대로 잘라내는 것은 여러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방사선 조사로 암의 크기를 최대한 줄여 놓은 후 절제하는 것이 최근에 많이 시행되고 있는 치료법이라고 한다. 암이 있는 부위에 국소적으로 조사한다고 해도, 주변의 세포까지 손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 그달에 폐경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굳센 분이었다. 온몸으로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라고 외쳤건만, 옆자리로 성큼 자리를 옮겨 앉았다.
"병원에서 몇 시간째 있는지 모르겠네", "오늘은 방사선 치료 진행이 느린 거 같다."
들으라는 게 분명한 할머니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
나는 그만 할머니에게 몸을 돌렸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할머니는 유방암 환자였다. 6년 전, 유방암에 걸려 힘든 수술과 치료를 이겨내고 5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1년 만에 또 암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방광이었다. 방광에도 암이 생기는지 몰랐다며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질병이 유방에서 생겼으니, 혹여 전이가 되면 주변 기관인 폐나 위 등으로 오지 않을까 싶었다고.
“윗동네 위주로 관리하며 살았는데, 엉뚱하게 아랫동네로 왔어.”
암이 정말 무서운 것은 5년 동안 재발이나 전이 없이 완치 판정을 받는다 해도, 할머니처럼 언제 어떻게 또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드디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시작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할머니는 담담했다.
“이번에도 이겨내야지. 그런데 애기는 어디가 아픈 거야?”
“애기요? 저 마흔다섯이에요.”
할머니는 내가 어린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마스크까지 썼으니 오해할 법도 하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이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는지, 안 됐다 싶었다고 했다.
“그래도 마흔다섯이면 너무 이른 나이다.”
할머니는 딱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은 먹었어요? 괜찮으면 이거 고구마 좀 먹어봐.”
이후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할머니와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는 부산사람으로 치료 때문에 서울 사는 딸의 집에 기거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싸 온 고구마나 과일 등을 먹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미안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외모에 무엇보다 피부가 뽀얗고, 매끈매끈 윤기가 흘렀다. 피부가 좋다는 나의 감탄에 할머니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피부 같은 거 시커멓고 거칠어도 되니까,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2021년 가을과 함께 시작됐던 치료는 계절이 바뀌어 12월 초가 돼서야 끝이 났다. 31회 방사선 치료가 끝난 후 내시경으로 확인한 암덩어리는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쪼그라들어 있었다. 방사선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효과가 없다면 이상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드물게는 그런 경우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수술이 가능한 상황이 되어, 6시간에 걸친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를 즐겼던 나였지만, 대장암을 진단받은 이후에는 가족들 이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운동하는 시간 말고는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외출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 누구와도 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이 사회에서 암은 사람한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로 여기고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일이 내 일이 되었다.
이제 막 시작한 암에 대한 경험은 너무도 강렬했고, 암환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무엇보다 이제 아홉 살이 된 딸과 다섯 살 난 아들의 성장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저 숨고 싶었다.
그 생각은 병원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비교적 젊은 나이라는 것이 더 눈에 띄지 않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보기에도 위중해 보이는 환자의 모습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더해졌다. 때문에, 모자를 눌러쓴 채 인상을 쓰고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내 모습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말을 걸어왔다.
혼자 있겠다고, 온몸으로 소리 지르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고 다가와, 함께 있어 주었다. 굳은 얼굴로 구석에 서있던 나는 넉넉히 마음을 내어준 할머니 덕에 어느덧 편안한 자세로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릴 수 있었고, 할머니와 한숨과 웃음을 나누며 그 길고 지겨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병원에서 누군가 나를 반가워해주고, 나도 반가워할 사람이 있다는 건 용기가 되는 일이었다.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수술도 받으셨을 텐데, 회복하며 잘 지내고 계실까. 이렇게 오래 할머니 생각이 날 줄 알았다면 연락처라도 받고 헤어질 걸 그랬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던 날, 우리는 “이제 다시 보지 말자”며, 뻘개진 눈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와 나에게 남은 일은 병원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는 일이었다. 지난 2년 간의 일들이 남의 일인 양 새삼스러워질 만큼 할머니도 나도 아픈 일 없이 영원히 건강했으면 좋겠다. 어느 날 부산을 가게 되면 막연히 할머니를 찾아볼 것 같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할머니를 보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지.
“할머니 고구마 좀 드셔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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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년 전에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기로 해요'라는 주제로 발행했다가 매거진을 편집하면서 발행취소했던 글입니다. <뮤뮤의 우연한 만남> 브런치북의 주제와 맞아 끝부분을 수정하여 재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