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창 시절은 쟤 뒷모습만 보다가 가는구나.”
힘없는 박수를 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전교생이 빽빽하게 들어찬 운동장을 뒤로하고 한 남자애가 단상에서 상을 받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민석, 우리 중학교를 대표하는 불굴의 전교 1등. 모든 과목을 다 잘하는 애. 화려한 수식어만큼이나 외모도 꽤 괜찮았다. 180에 마른 체형, 쌍꺼풀 없는 갸름한 눈에 우뚝 솟은 코. 배우 조인성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백민석 볼에는 여드름이 잔뜩 올라왔다는 것.
뭐, 백민석이 여드름쟁이든 아니든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존재감 약한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는 우리 학교 사람이라면 전교생은 물론이고 교직원까지 알만큼 유명한 애였다. 공부를 잘하면 다른 거 하나쯤은 못해도 되련만, 영어말하기 대회, 과학경시대회, 수학학력대회, 전국의 대회란 대회의 모든 상은 그가 휩쓸었으며 때로는 한 번에 서너 개의 상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한마디로 어나더 레벨이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우리 학교는 '백민석과 나머지들'로 구분되어지는 듯했다. 백민석이 상을 탈 때마다 나머지들은 박수를 쳐줘야 했고, 3년쯤 박수부대로 동원되고 보니 졸업할 때쯤에는 이 반복되는 장면이 지겹기만 했다.
“전국토론대회는 또 뭐야? 걔는 그걸 언제 나갔대?”
조회가 끝나고 친구 홍미연의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선생님들은 왜 소리소문도 없이 백민석만 대회에 내보내는지, 전교생한테 대회 소개를 하고 지원자를 받고 진행해야 공정한 거 아닌지, 마치 수상기회를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투덜거리는 내 말에 미연이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선생님들이 뭐 하러 그런 수고를 하겠니. 백민석이 나가면 무조건 상을 받아오는데. 못 하는 애한테 열 시간 공들이는 것보다 잘하는 애 한 시간 바짝 가르쳐서 내보내는 게 낫지.”
미연이는 “혼자 잘하는 애한테는 신경 끄고, 겨울방학 때 영어학원이나 같이 다니자”라고 했다. 겨울방학이 얼마 안 남은 때였고, 졸업과 동시에 고등학교 입학이라는 큰 변곡점이 열여섯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날 오후, 반장었던 나는 선생님 심부름을 하느라 하교시간이 늦게 되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서는 순간, 누가 뒤에서 어깨를 가볍게 쳤다. 몸을 돌리니 키 큰 남자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민석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너 3학년 6반이지?”
“어? 어어.”
항상 먼발치에서만 보던 애가 바로 내 코 앞에 있다니, 이게 현실인가 싶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저기, 할 얘기가 있는데..”
백민석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곁눈질로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하교가 늦은 몇몇 애들이 우리 옆을 지나가며 한 번씩 쳐다보았다.
“너 집 번호가 뭐야? 내가 전화할게.”
나는 얼른 우리 집 번호를 댔고(삐삐도 없던 시절), 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든 까만 봉지를 나에게 안겼다.
“이거 먹어. 나 갈게.”
민석의 등이 눈부신 노을빛으로 물드는 걸 한참을 서서 지켜봤다. 그 아이의 뒷모습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멋있는 데가 있었다. 봉지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흰 종이봉투 안에 노릇하게 익은 붕어빵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내가 붕어빵을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상점마다 장식된 장식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넘실거렸고, 트리의 주홍빛 전구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온 세상의 활기와 설렘이 내 가슴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날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를 길 없어 한잠도 자지 못한 나는 등굣길에 미연을 만나자마자 민석이와의 일을 얘기했다. 혼자서 품기에는 너무 벅찬 비밀이었고, 단짝인 미연에게까지 숨기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미연이는 우리가 아는 그 백민석이 맞냐며, 소리를 지르고 내 등을 때리며 호들갑을 피웠다. 나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쏜살같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내 전화기 옆에 붙어있었다. 6시쯤, 드디어 벨이 울렸다. 민석이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애써 태연한 듯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했다.
“응. 얘기해.”
“저기, 너 홍미연이랑 친하지?”
응? 홍미연? 미연이가 여기서 왜 나와? 어리둥절한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민석이 말을 이었다.
“나 오래전부터 미연이 좋아했거든. 네가 다리 좀 놔줄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지만 학원에 같이 다니자던 미연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나도 미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어느 날, 출출한 배를 달래려고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저 멀리 포장마차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년 내내 지겹도록 본 뒷모습. 백민석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친구 미연이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하는데 뱃속이 고프다 못해 아파왔다. 아침부터 굶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