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올케가 오랜만에 집에 놀러 왔다. 스튜어디스인 올케는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예뻤다. 세월은 나한테만 오는지 올케는 나이도 안 먹고 항상 그대로이다.
“오랜만에 보네. 일은 안 힘들어?”
이제 올케도 마흔(외모는 갓 서른 같지만), 낮밤이 바뀌는 근무에 지칠 때도 온 거 같은데, 아직도 일이 재밌단다. 우리는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아이들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주제의 대화가 오랜만이다. 반년 넘게 지인 한 명 못 만나다 보니, 이런 평범한 수다조차 드문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른 여자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만날 보는 얼굴이라고는 칠순 엄마와 남편,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치고받고 싸우다 또 최고 단짝처럼 구는 흔한 남매 한쌍이다.
평소 올케는 민낯으로 다니는데 오늘은 퇴근 후 바로 우리 집으로 온 거라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블랙 코트에 니트를 입은 올케는 세련된 도시여자 그 자체였다. 화장을 진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지, 난 추잡한 늙은이처럼 올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윤이 나는 새까만 머리카락, 맑게 빛나는 고운 피부, 물기 어린 커다란 눈, 생기 있어 보이는 다홍빛 입술. 그러고 보니 올케는 모든 게 반짝였다. 머릿결도, 피부도, 눈도. 반짝반짝.
올케의 반짝임이 잘 관리된 외모 때문인지, 일이 즐거운 사람의 생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올케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그것을 생각해 냈다.
바로 beauty의 세계. 꾸밈의 세계 말이다.
지난 글에 풀었듯이 샴푸 하다가 머리카락이 통째로 빠진 이후 나는 하루하루 골룸의 형상에 바짝 다가가고 있다. 거울볼 맛이 안 나기도 하고 마침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즈음이라 뷰티의 세계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원래 바쁜 일상이었는데 틈나는 대로 책 읽고, 글 쓰느라 그럴 여유도 없고 생각도 안 났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나는 뷰티 디바이스로 관리를 하고 유튜브로 패션 트렌드를 파악하고 가끔은 그에 맞는 옷과 신발을 사는, 꾸미는데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비록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를 관리하는 게 삶의 낙 중에 하나였다. 아이엄마들을 만나면 이제 꾸미는 게 귀찮지 않냐며 나를 신기해하곤 했다. 그렇게 평생 갈 줄 알았던 줄 알았던 불치병이 글 쓰며 치유되는 건가.
그런데 올케의 반짝임이 잠시 잊고 있던 본능을 건드렸다. 화장을 해도, 예쁜 옷을 입어도 순식간에 아무 소용없게 만드는 골룸 머리를 만회할 가발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유명 가발 매장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음, 그런데 가기 귀찮다. 오고 가고, 신중하게 골라야 할 시간이 아깝다. 그 시간에 글 하나를 더 쓰는 게 낫지. 엇, 나 이 정도였어? 푹 빠진 거에 비해 몇 개 밖에 안 쓴 글이 아이러니다.
예전의 나 같으면 당장 매장으로 출동해서 두세 개는 골라왔을 텐데, 그냥 인터넷에서 가성비 괜찮아 보이는 가발을 주문했다. 다음날 도착한 가발. 생각보다 괜찮다. 인모가 아니라 가발티가 좀 나긴 하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거 같다. 거울 앞에서 가발과 어울릴 모자를 이것저것 써보며 골룸에서 벗어난 모습에 만족했다. 그것으로 끝.
인형놀이가 싫증난 꼬맹이가 인형을 툭 내려놓듯 난 가발상자를 화장대 한구석으로 던져놓았다. 그리고 읽고 있던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손에 들었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자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출처 : pixabay
김애란 작가는 타고난 글쟁이구나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감탄하다가, 음 이건 너무 멋 부려서 쓴 거 아닌가, 분수도 모르고 비평가 빙의해 본다. 문득 글감이 생각난다. 머릿속 타이핑을 치며 초고를 얼추 완성해 본다. 벌써 한 시간이 후딱.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운동도 해야 하고 흔한 남매들 먹거리도 챙겨야 한다. 아, 반납일이 다가오고 있는 책도 마저 읽어야 하고 필사할 부분도 확인해야 한다.
바쁘다 바빠.
그러니,
당분간, 뷰티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