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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an 07. 2023

절대 격려해 주지 않는 이유 | 02편

왜 그렇게까지 냉정해야 하는지 직접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현재 폴피리라는 항암을  받고 있다. 이 항암을 받기 위해서는 케모포트라는 걸 오른쪽 쇠골뼈 아래에 심어야 한다. 항암제에 독성이 있기 때문에 팔의 혈관이 버티질 못하고 녹아버려서 굵은 중심정맥으로 약을 주입해야 하는데 이때 케모포트라는 장치가 필요하고, 균이 들어갈 수 없도록 피부 속에 삽입해 놓아야 한다.


이 케모포트를 심는 수술을 본 병원에서 연결해 준 한 개인병원에서 받았다. 수술대에 누우니 시술을 받는 목 주변 부분만 구멍이 뚫린 천으로 전신이 덮였다. 목 주변만 마취가 되기 때문에 정신은 또렷한 상태. 마취약 덕에 살을 째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예민한 목 주변에서 수술이 이루어지는 걸 고스란히 듣고 느끼자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이 아주 소탈한 분이어서 시술받는 30여 분 동안 대화 하면서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는데 난 이때다 싶어서 병원 다니면서 느낀 걸 얘기했다(이 30분 경험이 참 특별해서 글 하나로 또 정리하려고 한다).






의사는 대형병원에서 대장암 전문 외과의로 근무해서 나의 불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명의 의사가 봐야 할 외래환자가 너무 많다고 했다. 한 세션 외래진료 기준 보통 50~100명씩 봐야 하니, 한 명의 환자 당 시간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환자가 느끼는 걱정과 불안까지 얘기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의사가 관성적으로 진료를 보는 거 같지만 환자 중 미리 기록을 봐둬야 하는 환자도 있고, 항암 중인 환자, 항암을 할 수 없는 환자, 수술을 앞둔 환자, 수술이 끝난 환자,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 등등 난이도에 따라 각각 다른 상태를 체크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몇 분간의 진료시간이 빠듯하다고 했다. 잠시만 긴장의 끈을 놓아도 엉뚱한 판단을 하거나, 잘못된 약을 처방내릴 수 있다. 체크를 반복하지만 그런데도 실수가 발생하면 큰일이다.


그 와중에 친절하고, 의술은 물론 인성까지 갖춘 의사가 되기란, 우리나라 대형병원 시스템에서 고군분투 중인 의사들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동감하기 시작하면 그 의사는 일 그만둬야 해요."


그의 말이 쿵 마음에 들어왔다. “환자의 말에 동감하기 시작하면 실수하게 돼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일에 실수만큼 최악의 일은 없죠.” 아. 그렇구나. 내가 그토록 갈구했던 격려, 동감이라는 게 의사한테는 금단의 영역이었구나. 비슷한 내용이 혈액종양내과 김선영 의사의 브런치북 '3분 진료 공장의 세계'에도 나와있다.


냉정함. 그 모든 것에 공감하지 않기. 내가 할 수 없는 부분까지 생각하지 않기. 마음에 한가함을 주지 않기 위해, 병원을 나가서 이 환자가 어떻게 지낼지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않기 위해, 마음을 바쁘게 채운다. 철저히 의학적 관점에서 경중을 따져 더 필요한 환자가 더 돌봄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되돌아보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울지 않기 위해.



의사들에게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냉정함은 그들이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의사와 환자는 치료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한배를 탔지만 이토록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드는 생각은, 환자가 진료를 보면서 서운하고 불안하며 종국에는 슬프기까지 하다면 그것이 의료의 본질적인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느냐이다.


환자의 경험이 곧 의료의 질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 대형병원이 저비용 고효율의 의료인 것은 맞지만, 환자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이에 검색을 해보니 외국에서는 암환자들의 불안, 치료 후유증, 동반질환 관리까지 통합적으로 해주는 관리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꽤 많은 의료진들도 이제는 대형병원에서의 30초 진료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 기반한 구조화되고 환자 중심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직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이렇게 직접 만난 의사와 책, 칼럼을 통해,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의사와 환자는 조우하지만 각각의 입장은 아주 상반되며 특히 감정적인 부분에서의 접점은 갖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 또 한 가지. 대장암 4기인 내 상태가 그런 격려를 받기에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들은 항암을 권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버는 것일 뿐, 결국 내성이 생기고, 전이나 재발로 점점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완치될 거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산책하다가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조금 슬펐다. 반드시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커서 거기까지는 아예 생각을 못 했던 거 같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안 될 경우를 생각하면 하루도 버티기 힘든 것이 암환자의 삶이다.


종양내과 김선영 의사는 <외래진료라는 전쟁> 칼럼 말미에 진료시간이 '환자 스스로가 수많은 외래 건수 중  하나로 처리되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사를 만났다고 여길 수 있는 시간'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다. 이제 의사들의 입장은 이해했으니 격려를 들으려는 바람은 접었다. 그저 앞으로 병원문을 나설 때, '의사를 만났다'라고, 그 정도 만족은 들기를 바란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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