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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an 07. 2023

절대 격려해 주지 않는 이유 |  01편

왜 그렇게까지 냉정해야 하는지 직접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왜 날 격려해 주지 않냐고 정색하고 쓰는 글이다. 격려는 해주는 사람 마음이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진지할 일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상은 의사이다. 암에 걸리기 전, 내게 있어 의사는 그저 약을 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이전까지 병원을 찾을 때의 질병이라고는 알레르기성 결막염, 비염, 목디스크 정도의 일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치료보다는 평생 달래면서 가야 하는 질병으로,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약을 받기 위해 의사를 만날 뿐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태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친절하거나 좀 덜 친절하다의 차이 정도.


그러나 암이라는 중병에 걸리자 의사들은 너무나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수술시간 동안 그의 손끝에 내 생명이 달려 있고, CT 영상을 훑는 그의 눈길에 내 미래가 달려 있다. 현재 상태를 알리는 그의 짤막한 한마디에 온 신경이 곤두서고,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을 살피기 바쁘다. 몇 분간의 면담시간이 끝나면 나와 가족들은 몇 문장 안 되는 의사의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가 너무 바빠서 놓쳤을지도 모를, 아니면 생략했을 정보를 찾아 가족들과 나는 인터넷과 전문서적을 찾아가며 각개전투를 시작한다.


알고 있다. 의사와 환자는 다른 입장이라는 것을. 생명을 다루는 아주 극적인 순간을 공유하고, 잦은 만남을 반복하지만 서로 가까워지기는 힘들다는 것을. 의사와 환자가 한마음이 되어 회복을 위해 진심으로 격려하며 나아가는 것은 영화에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생명이 위협받는 와중에, 의사와의 사이에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멍청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병원을 다니는 일이, 의사들을 겪는 일이 이렇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주치의를 만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그가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날 콕 찍어 미워하기로 결심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태어나서 누구인가로부터 미움을 받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주 낯선 경험이었다. 어쩌다 밉보이게 됐을까, 왜 내가 미울까,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물론, 그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주치의는 대장항문외과 명의로, 그의 환자라고 해도 병원에서 잡아준 정기 면담일 이외 그를 만나려면 4~6개월을 기다려야 하거나 아예 만나지 못한다. 나를 미워할 1초의 시간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피해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런 고민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다. 환우회 카페에 가면 병원에서 받은 상처와 실망감에 대해 토로한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치의 면담일이 잡혀 있는 날은 며칠 전부터 수험생 모드로 들어간다. 궁금한 질문들 리스트를 뽑아 그중에 인터넷이나 책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질문은 거르고, 꼭 주치의를 통해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핵심질문 몇 개를 추스른다. 그리고 중요도를 체크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맨 앞에 배치한다. 허락된 시간 2~3분을 넘기면 그가 일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대장암에서 폐전이로 병기가 3기에서 4기가 되었을 때(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욱 절망적인 상태), 주치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궁금한 걸 물어보라고 했지만, 내가 세 번째 질문을 하려고 했을 때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이 바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나름 핵심질문이었는데도). 그리고 '잘 될 거야'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진료실을 떠났고,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감사합니다'하고 그의 등뒤에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병기가 더 심해진 상황에 감사하다는 인사라니).


그렇게나 주치의는 바쁜 분이다. 진료실로 들어오면서 손목시계를 보곤 해, 환자로 하여금 빨리 면담을 끝내야 하는구나 하는 조급함을 느끼게 한다. 면담을 하면서도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 옆방으로 달려가야 할 것처럼 빠르게 말하고 마무리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면담은 거의 1분 이내로 끝나곤 했다.


동생은 의사를 만나고 나면 뭔가 내쳐진 기분이 든다고 했다. 주치의의 바쁨은 감정적인 서운함으로 끝나지 않기도 했다. 1년 정기 검사에서 중요한 CT 촬영을 누락해, CT를 찍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아야 했으며, 그 촬영 결과를 보러 주치의를 만나러 갔을 때 암이 폐에 전이된 사실을 알게 됐다. 주치의는 좀 놀란 모습으로 서둘러 PET CT(CT보다 더 미세한 암을 촬영) 촬영일을 잡았다. 빠르게 PET CT 날짜를 잡아준 것은 감사했으나 동시에 알게 되었다. 환자의 사진결과를 면담 전에 미리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구나. 그래서 전이사실조차 환자와 같이 알게 되는구나 하고 말이다.






1년 반 동안 겪은 암치료 과정은 어떤 모형틀 안에 나를 끼워 맞추는 과정 같았다. 정형화된 틀이 몇 개 있고, 의사는 그중 환자와 가장 맞을 거 같은 틀 안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환자는 몸을 욱여넣어서 그 틀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공장 가동. 간신히 몸을 맞춘 환자는 그 틀 안에서 최대한 버텨낸다. 불행히, 틀과 몸이 안 맞는 환자는 내내 고통에 시달린다. 결국은 치료를 이겨내지 못해 다른 틀을 찾거나, 아니면 다른 틀이 나오기까지 기다린다. 환자는 이 과정에서 의사가 이 과정을 견뎌내는지 지켜볼 뿐, 환자가 느끼는 불안과 고통, 이겨내려는 의지와 희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의사의 관심은 오로지 질환 그 자체와 치료의 진전인 거 같다.


물론 의사가 깊은 동감이나 걱정까지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미 우리나라 대형병원의 30초 진료시스템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환자가 그 시스템에 적응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들어야 하는 환자 입장에서는 오로지 의사만을 바라보고 바짓가랑이 붙잡는 절박한 심정이 된다. 그러나 의사의 태도는 마치 아프리카와 북극의 그것처럼 상반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 돈 내고 치료받는데, 이런 푸대접까지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좌절하게 되는 순간은, 병이 더 심해져 치료의 끝이 왔을 때, 주치의가 어떤 노력과 아쉬움도 없이 돌아서는 것이라고 한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전립선암 4기 남성분은 대형병원에서 5년여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얼마 전에 주치의로부터 '이제 맛있는 거 실컷 드시고 사시라, 병원에 그만 오셔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더 이상 치료가 없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통보하는 의사에게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단계이지만, 그 순간이 왔을 때 내 주치의가 100% 그렇게 하리라는 슬픈 확신이 든다.


 '아픈 몸을 살다(메이 역, 봄날의 책)'의 저자 아서 프랭크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친밀하게 대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썼다.

암을 앓는다는 건 사소한 일이 아니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질병을 겪고 죽음을 무릅쓰는 것, 거의 죽어가다가 삶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는 채로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 모두 사소한 일이 아니다. (중략) 나는 이 여행이 인정받길 원한다. 아무리 업무에 치인 의사들이라도 내가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경험은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의사들이 아서 프랭크처럼 나의 여정을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잘 될 거라는 격려를 바랐다. 나을 수 있다고,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용기를 주는 격려였다. 의사가 그런 격려를 해준다면, 아무리 힘든 순간이라도 그 말의 끈을 잡고 치료의지를 다질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대장암에 폐전이까지, 1년 반 동안 병원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어도 한 번도 이런 격려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게 당연한 거 아닐까. 격려에 왜 그렇게 각박한 걸까. 그 말을 했다가 아니게 될 경우 환자에게 멱살이라도 잡힐까봐 두려운 걸까.


의사를 이해하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도 하고, 의사가 쓴 책이나 칼럼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하고, 의사로부터 직접 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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