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둔녀의 안물안궁 고백
나는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오랜 기간 은둔녀로 살 지는 꿈에도 몰랐다.
나의 사십 대는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가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했었다. 결혼해서 아이들이 생길 테니 아이 친구들 엄마들과의 친목모임,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활동, 지역활동과 내 관심분야의 온오프라인 활동, 결혼 전에 맺은 지인들 관계유지까지, 여러 일들을 하며 활발하게 살겠지 짐작했다.
웬걸, 은둔녀도 이런 은둔녀가 없을 정도로 나는 집순이로 근 10년을 살고 있고, 작년에는 거기에 암환자라는 호칭을 더 했다. 은둔의 삶을 부정적인 느낌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은둔 또한 현대사회의 여러 삶의 형태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줄 몰랐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내 삶의 형태가 비교적 사회적으로 활발한 편에 가까왔기 때문이다. 월간지 기자였던 나는 취재를 위해 매달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고위 간부급부터 이제 갓 조직에 들어온 새내기 직원까지 고루고루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재미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치기는 해도, 일 그 자체가 지겨운 적은 없었다. 주먹으로 벽 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다 생각하면 금방 마음의 정리가 되고, 또 그 상처는 새롭게 만난 취재원이 주는 에너지로 치유되곤 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뀐 건, 많은 여자들이 그렇듯이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서였다. 남편이 해외로 파견근무를 나가야 했고, 심사숙고 끝에 나도 동행하기로 결정 10년 간 다닌 회사를 퇴사했다. 그런데 일이 어그러져서 남편만 출국하고, 난 친정에서 일 년 간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되었다. 재취업을 생각해 보았지만, 출판사에서 통상 주는 월급이 맞벌이의 여러 고난을 감수할 만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양가 모두 우리 아이를 봐줄 수 없는 상황에서 내 월급은 통째로 아이 이모님에게 들어갈 것임이 계산기로 두드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직장인이 아닌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제2의 인생을 즐겁게 맞이하자고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난 아이한테 완전히 빠져버린 상태였다.
아이가 한 살 되었을 즈음,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경기도의 한 작은 신도시에서 새살림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입주하기 시작한 동네는 늘 적막했다. 당최 사람들은 집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지 의아해하며 종일 아이와 함께 빈 놀이터를 전전했다.
점점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파트, 식당과 학원으로 가득 찬 상가건물 사이에서 어디 하나 마음 가는 곳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구불구불한 언덕길로 이루어진 서울 부암동, 작은 갤러리와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선 삼청동, 마당 있는 집과 작은 카페, 작업실 등이 한데 어우러진 동교동 같은 곳이다. 오래되어 세월의 아우라가 느껴지고, 가게 하나, 집 하나마다 뭔가 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 동네를 좋아한다. 그러니 반듯하게 정리된 길에 일렬로 늘어선 새 건물과 아파트들은 마치 모델 하우스처럼 사람 냄새 하나 없는 인공적인 세트장처럼 다가왔다.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면서 서울을 힘겹게 드나들었다. 살고 있는 동네를 잠시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거 같아서였다. 삼 년 애착기간을 채우고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있어서 아이를 세 살까지 데리고 있다가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동안 오며 가며 동네 엄마들도 제법 많이 알게 되어 몇몇 모임이 생겼다. 아이가 아닌 어른과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아니었다. 나는 엄마표 교육을, 다른 엄마들은 사교육을 지향했는데 관심분야가 달라서일까. 어디 어디 학원, 학습지, 학교 등에 대한 얘기를 잔뜩 듣고 오는 날이면 기가 쭉 빨린 느낌에 한두 시간은 누워 있어야 했다.
아. 이것도 아닌데. 대체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하는 걸까. 시민단체나 연합회, 정치하는 엄마 이런 덴가. 관심분야인 책이나 그림, 교육 쪽으로 알아볼까. 사춘기도 아닌데 갑자기 자아성찰이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마흔 넘어 새삼 잠재력을 살릴 일을 알아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형이든 무형이든 어떤 결과물을 내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십 년 넘는 세월을 회사라는 곳에서 보내면서 나도 모르게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습성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는지 자꾸 어떤 단체의 구성원이 되고 싶었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마음먹었다. 버스, 지하철을 타며 다니자니 어딜 가든 왕복 세 시간 이상이 걸려, 아이 하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대형 1종 면허가 있었지만 장롱면허인 관계로 돈과 시간을 들여 연수를 받았다. 여차저차 서울까지 왕복이 가능해 기동력이 생긴 순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가 생겼다. 마흔 하나에 둘째라니. 이제 졸업했다 생각했던 젖먹이기, 기저귀갈기, 이유식 먹이기, 이런 걸 5년 만에 다시 해야 한다고? 마음이 정리되기도 전에 몸에 적신호가 왔다. 도저히 무얼 먹을 수가 없었고 잘 먹지를 못 하니 대상포진, 조산기 등 각종 질병이 덮쳐 매일 누워 지내느라 운전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겨우겨우 둘째를 낳았는데 녀석은 울면서 잠들고 울면서 깨는 엄청난 예민아였다. 당시 이 아이가 어느 정도로 예민했는지 이야기를 풀자면 밤을 새울 거 같다. 둘째한테 정신없이 매달리느라 난 다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힘든 은둔녀가 되었다.
둘째 얘기를 하자면 마음 한쪽이 아리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것도 아닌데 둘째 키우는 게 너무 벅차고 힘들었다. 둘째가 아침에 깨는 소리가 들리면 오늘 하루 또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두려움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간신히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 때는 눈물이 베개를 적시곤 했다. 깊은 우울함이 나를 짓눌렀다. 아이들은 벅찬 기쁨을 안겨주는 동시에 나의 바닥을 수시로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둘째가 어린이집에 갈 나이가 되었고 이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가려던 참, ‘나도 이때를 기다렸네’ 하듯이 암이 찾아왔다. 친정의 도움을 받기 위해 친정 근처로 이사 오게 되면서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었다. 1년 반 동안 여러 차례의 수술과 치료를 받는 동안 어떤 다른 활동을 계획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졌다. 이래저래 지인들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나는 이렇게 의지와 상관없이 진정한 은둔녀로 또 한 번 거듭나야 했다.
나의 40대는 뭔가 좀 하려다가 주저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 세월 동안 결혼과 함께 커리어를 단절시킨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대기업에서 간부급으로 승진한 동기들을 보며, 그때 퇴사했어도 어떻게 해서든 재취업해서 맞벌이를 하며 버텼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을 치며 속상해하지는 않는다. 아마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때랑 같은 선택을 했을 거 같기 때문이다. 10년 간 나의 의지와는 먼 삶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말하지만, 이 또한 순간순간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인생이다. 주변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게 어때’라고 권유를 했지 그 누구도 손목을 잡아끌어 ‘그냥 이렇게 살아’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그러니 아쉽지만 모두 내 탓이다.
그렇다고 후회로 가득 찬 시간도 아니다. 엄마로 살다가 내가 없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의 역할을 한 사람도 분명 내 의지와 노력이 온전히 들어간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렇게까지는 못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수술과 치료로 약해진 몸의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몸에 좋다는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찬 나날이다. 무엇보다 항암 주사를 맞고 나면 며칠은 꼼짝 못 하고 누워 지내야 한다. 어떤 일을 도모하기에 또 한계가 많은 현실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못하게 한다고? 하며 오기가 차오른다.
며칠 전, 친정집 앞에 있는 마을 도서관을 저녁에 지나친 적이 있다. 6시면 문을 닫던 도서관이 웬일인지 주홍빛 불빛으로 환하길래 가까이 가보았다. 지역주민으로 보이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사람들 앞에는 와인잔과 프린트물이 놓여 있고, 한 사람이 일어나 무언가를 발표하고 있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어떤 멘트에는 종종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창밖에 서서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따스한 주홍빛 속에 시선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꿈속 장면처럼 아득해 보이고 아름다웠다. 아, 나도 저 자리에 앉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말을 듣기도 하고 발표도 하고 싶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껴보고 싶다. 실패하고 좌절할지라도 그 가운데 깨치고 좀 더 나아진다는 보람된 벅참을 다시 맛보고 싶다.
성냥팔이 소녀는 다시 한번 마음속 성냥에 불을 붙여본다. 바람에 꺼지고 또 꺼질지라도 자꾸자꾸 불을 붙여보는 성냥팔이 소녀, 바라만 보다 얼어 죽지 않고, 내 마음속 뜨거운 불을 언젠가는 활활 태워보리라. 사람들 속에 섞여 건강한 모습으로 임무를 수행하리라, 그렇게 소녀는 다짐에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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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말로 안물안궁인데, 주절주절 살아온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은 것만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네요. 이웃집 여자가 외로운지 묻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좀 이따가 항암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야 해요. 또 며칠은 끙끙 거리며 누워 있어야 겠죠. 다음주에 기운 차리는 대로 글 하나를 또 올리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역시 안물안궁인데, 굳이 알리며 이만 총총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