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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Mar 06. 2024

[프롤로그] 도시를 사랑하지만 산에서 살아보겠습니다.

모두가 산으로 가라네요


내리꽂는 듯한 햇살에 눈이 떠졌다. 미처 커튼을 달지 못한 방 안으로 아침햇살이 그대로 쏟아졌다. 창밖을 보니 마른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몸을 반쯤 일으키자 빽빽하게 줄 선 나무들이, 완전히 일어서자 눈이 반쯤 녹은 산봉우리가 보인다. 어제만 해도 창밖이 아파트로 채워졌는데 지금은 나무와 산이다. 이사 온 첫날 아침, 창밖 풍경이 생경하기만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뼛속부터 도시 여자인 내가 산 밑으로 이사 온 건 가족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21년에 암진단을 받고, 22년에 폐전이 진단을 받게 되면서 4기 암환자가 된 탓이다. 엄마는 처음 병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같이 산에 들어가자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 아니 사양했다.


엄마와 산속에서 둘이 살면, 암에 이어 약도 없다는 화병을 얻을 것만 같았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이 나이에 엄마와 단 둘이 산다는 건 숙고할 문제였다. 내가 걸리지 않는다면 엄마가 걸릴 터, 누구 하나는 명줄이 줄 것이 분명한 확률게임이었다.






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화분 키우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고 등산, 자연인 같은 세계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엄마와 산으로 들어가지 않는 대신, 매일 산공기를 마시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집에서 가까운 뒷산을 오르내리며 산공기를 마시고 체력을 키웠다.


정말 그 때문인지 항암이 끝난 후에도 반 년 넘게 암세포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것 보라며 아예 산에서 살면 얼마나 더 건강해지겠냐고, 5년 완치 판정받을 때까지만이라도 산 근처에서라도 살아보라고 했다.

“테레비에 나온 사람들 봐라. 병원에서도 손 놓았는데 죄다 산으로 가고는 결국 건강해지지 않았니.”


그놈의 산, 산, 산!






40여 년을 서울에서 산 나는 도시의 편안함과 풍요를 누리는데 익숙했다. 도시에는 보고 싶은 전시, 공연이 수시로 열리고 그 장소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필요한 물건도 지척에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문화이든, 모든 것이 촘촘하게 있는 곳, 도시의 역동성에 지치다가도 금세 새롭게 등장한 것에 호기심이 일어나는, 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을 꼽는다면 그것은 야경이었다.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을 사랑했다. 여러 빛으로 반짝이는 도시는 나에게 커다란 크리스마스 같았다. 그래서 이 야경을 매일 볼 수 있게 도심 한복판 높은 건물에서 살고 싶었다. 도시에 살면서도 더욱 도시적인 환경을 갈망했으며, 내 로망 중 하나는 제주 한 달 살기가 아니라, 광화문에서 한 달 살기였다.


때문에, 물고기가 물 밖을 나가면 죽게 되는 것처럼, 나라는 사람은 도시에서 벗어나면 심심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공기를 마신다 해도 시골의 적막이 나의 숨통을 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장암에 이어, 1년 만에 폐전이 진단을 받게 되자 더 이상 친정식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기가 어렵게 되었다. 식구들은 '폐'에 전이가 된 사실을 강조했다. 좋은 공기를 듬뿍 마시며 살아야 한다고, 그러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고, 마치 마지막 비법을 제시하듯 심각하게 말했다.


병에 걸린 이후 온 가족의 케어를 받게 되면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수술과 항암을 거듭하며 한 가정의 엄마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친정 식구들 중 누군가가 번갈아 가며 맡아야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생과 초등 저학년, 아직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와 병원에 다니느라 일 년 치 휴가를 일찌감치 소진했고,  바통터치하듯 남동생이 휴가를 쓰며  나를 병원에 날랐다. 여동생이 먼 곳에서 와서 아이들을 돌보고, 칠순의 엄마는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며 살림을 돌봤다. 가족들의 일상이 정지되었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여 가족들의 일상을 제자리에 돌려 놀 책임이 있었다.


가족들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쳤는데 결국은 결과가 안 좋을 때,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기 싫다는 계산도 섰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봤다면 나도 가족들도 조금은 담담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국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산에서 살아 보기로 말이다. 티브이에서 봤던 암생존자들처럼 어쩌면 나도 나만의 기적을 얘기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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