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지리산 같은 큰 산속 마을로 가기를 원했다. 매일 먹어야 하는 각종 채소들을 텃밭에서 직접 일구고, 산을 다니며 약쑥이나 고사리 같은 것들을 캐서 먹으면 얼마나 건강에 좋겠냐고 하셨다.
"유기농이다 뭐다 해도, 내가 직접 키워 먹는 게 최고지. 그리고 요즘 채소값이 좀 비싸니."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내가 능력이 안 된다.
그런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게 잡초인지 나물인지, 독초인지 약초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초록을 띈 것들을 구별하는데 유독 취약해서 민들레 잎사귀와 쑥을 겨우 구별하는 수준이다.
나물도 먹을 줄만 알지, 아는 나물이라고는 취나물, 냉이, 곤드레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여하튼 이 수준이다.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면서 최근에서야 방풍나물과 비름나물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상추랑 비슷하지만 오동통 두께가 있는 것이 봄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몇 년 전에 알았으니 말 다했다.
이것저것 심어보며 배워나간다 해도 체력이 있어야 그 시행착오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과 폐를 부분절제하고 항암도 2년에 걸쳐 2세트나 했던 내가 건강할 때도 안 했던 노동을 갑자기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시골 먼 곳으로 들어가면 서울에 회사가 있는 남편을 위해 오피스텔이라도 얻어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살림살이는 갖춰야 할 것이고, 남편 나름대로의 생활비도 들어갈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일 테지만 더욱 염려되는 건 그의 건강이었다. 운동을 멀리하고 술과 야식을 즐기는 남편이 혼자 몇 년을 그렇게 지낸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부부가 나란히 환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남편이 서울로 출퇴근할 수 있고 애들이 학교와 학원에 다닐 수 있는 곳, 그러면서 산에 인접한 곳. 이것만으로도 까다로운 조건인데, 또 하나의 요소가 추가되었다. 제부도 출퇴근이 가능한 곳. 그랬다. 동생네도 같이 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언니 완전히 나을 때까지 옆에 있을래.”
동생은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를 결정한 시점에 생각지 못한 이벤트가 발생했었다. 남편의 장기 해외근무 지시가 떨어진 것. 몇 년은 나 홀로 애들과 지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아직 5년 완치 판정도 받지 않은 나를, 서울 근교라고 해도 홀로 산밑에서 지내는 건 무리라는 게 가족들의 의견이었고 동생이 내 옆에 있겠다고 먼저 말해준 것이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실행하자면 어려가지로 감수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제 유치원에 들어가 막 적응을 마친 동생의 아이들을 다시 전원 시켜야 하고, 제부는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동생의 시부모님 그러니까 제부의 부모님은 제부를 근거리에 두고 살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며느리가 갑자기 언니 옆에서 살기 위해 지방으로 간다니 마뜩잖으셨던 것이다. 나도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동생의 뜻은 확고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한 점도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참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시부모님이 결국에는 크게 화를 내셨던 모양이다. 왜, 아니겠는가. 코 앞에 일터가 있던 당신 아들이 새삼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부터 싫으셨을 것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부모님 앞에서 동생도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명의 감수와 감수를 거쳐 이사가 진행되었다. 동생은 석 달을 넘게 발품을 팔더니 그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을 용케도 찾아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산밑 동네였다. 제부 직장에서 차가 막히지 않으면 30분 거리에 있는 곳이라 나는 엄청난 부담감과 미안함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대로 한동네에서 같이 살 수는 없었다. 동생의 시부모님이 여러 가지로 안정적인 아파트를 고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산밑 바로 아래에 있는 집을, 동생은 우리 집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각각 집을 얻게 되었다.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과거와의 단절도 의미했다. 어쩌면 두 의미 모두 나에게 절실한 것이었다. 수술과 치료로 아팠던 시간을 끝내고, 하루하루 건강해지는 삶을 시작하는 것,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그것이 이사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실현 가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새로운 동네에서 내 인생이 통째로 새로워지기를,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이삿날을 기다렸다.
“엄마~”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등 뒤에서 딸애가 나를 나직이 불렀다. 살짝 기운이 빠진 듯, 엄마의 '마'를 느리게 끌면서 나를 부를 때는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부탁이 있을 때였다. 고개를 돌아보니 딸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엄마 나 이사 가기 싫은데... 꼭 이사 가야 해?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아, 괜찮다고 했던 딸이 못내 마음을 정리하기가 힘이 든 모양이었다. 2년 전 이사 때도 딸은 한동안 먼저 동네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힘들어 했다. 그러다가 새친구도 사귀고 회장도 맡으면서 학교에 정을 붙였는데 또 다시 이사라니. 딸의 슬픔과 불안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다. 아이를 가만히 안아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너가 원하면 엄마 낫자마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게.”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