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낯설디 낯선, 산동네
이곳으로 이사 온 날부터 내내 비가 내렸다. 나는 흐린 날에 유독 취약하다.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내내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비가 그친 날, 드디어 집을 나와 동네를 걸어보았다. 경량 패딩 위에 두툼한 스웨터를 하나 더 걸치고 나왔는데도 추웠다. 산 밑이라 그런지 공기가 청량하면서도 코가 시큰할 정도로 차갑다. 바람마저 맑은 느낌이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산바람 이어서일까. 살 속을 저미는 것만 같은 날카로움에 등이 굽어졌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동네를 한참 걸었지만 마주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로 몇 번을 산책하러 나왔지만 동네는 여전히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인기척 없는 길을 걸으며 문득 내가 이 장소에 있다는 현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확실히 그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장소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산도 마을도 적막하기 그지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마흔 중반을 넘은 지금의 나이까지, 나는 사람들이 꽤 북적이는 곳에서 살았다. 이쪽으로 이사를 오기 전 동네가 절정이었다. 구시가지인 그곳은, 원래 살던 지역민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온 외지인까지 더해 명동 한복판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특히 퇴근시간 무렵의 지하철 역 주변은 오가는 인파에 어깨를 부딪치고 발이 밟히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런 복작거림이 지겨우면서도 우울함이 찾아오는 것 같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길을 나서고는 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묵묵히 걷다 보면 저절로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보이면 한참을 앉아있고는 했다. 불멍을 하듯,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엉덩이를 훌훌 털고 일어나 한결 후련해진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 람. 이. 없. 다. 집마다 주차된 차와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보면 분명 사람들이 사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오가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고요와 적막이 동네에 큰 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활기와 분주함으로 가득했던 옛 동네들이 오래전에 꿨던 꿈처럼 아득하게 떠올랐다.
사람들 속에서 나를 충전했던 방식이 꽤 깊게 스며들었던 걸까. 산책을 다녀와도 예전 같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거실 창밖으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보고는 했다. 하지만 창밖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달과 함께 떠오르는 도시의 야경 대신 이제는 거대한 돌산이 창밖을 가득 채웠다.
해의 잔광이 사라지고 나면 돌산은 까맣고 높은 장벽처럼 우뚝하게 솟아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름 모를 절벽 아래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컴컴한 창 밖으로 보이는 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이었다. 곧 사라질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나를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와 돌이킬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붙여야 했다. 그래야 종일 집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아이들도 이 동네에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동네에 익숙해지기 위해 자꾸 길을 나섰다. 마을은 조성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길은 반듯하게 나있고, 집들은 깨끗했다. 하지만 상가건물 하나 없고, 산을 끼고 있어 해가 지기 시작하면 시골마을처럼 금세 어두워졌다.
해 지기 한 시간쯤 전에 집을 나섰다. 이제는 오가는 사람들 대신 집들을 눈에 넣으며 길을 걸었다. 저물 무렵이면 집들마다 전등이 하나둘씩 커지고 가로등이 드물게 있는 마을길은 어둠 속으로 묻혀간다. 집들은 밝아지고 길은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게 맞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살던 곳은 밤이 되면 낮보다 환해지는 게 당연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도시 자체를 사랑한 게 아니라 도시 속의 외로움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아프고 나서는 가족들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아파서 혼자 있게 된 외로움은 전의 그것과 질이 달랐다. 고독의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느낌이었다.
치료가 끝나고 몸이 회복하게 되고 나서는 이제 세상 속에 섞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꿈꾸며 힘든 치료를 견디어 낸 것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나가고 싶은 그 순간에 세상에서 먼 곳으로 이동했다. 도시에서는 외로운 생활을 자처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반강제적으로 그렇게 지내야 할 것 같다. 고독에 고독을 잇대어가면서 걷고 또 걸어야 할 것 같다.
마을을 두 바퀴 정도 돌고 나면 어둑어둑한 가운데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을 볼 수 있다. 그 모습도 잊지 않고 눈에 넣는다. 이제는 저 산을 사랑해야 하니까.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숲 위를 가로지르는 새들, 배 밭의 거름냄새,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을 최대한 담는다. 이제 나를 충전해 주는 것은 그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산과 마을을 저장한 몸으로 내 집 앞에 서면 다른 집들처럼 따스한 전등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면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마치 나도 이 집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몸짓으로 집에 들어선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저녁을 차리기 시작한다. 낯선 곳의 낯선 적막과 고독이 언제 가는 평화로 바뀔 때까지, 어떻게든 나를 이곳에 붙여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