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바로 뒤가 산인데도 보름 넘게 등산하지 못했다. 이삿 짐 정리하랴, 봄 방학 중인 아이들 삼시 세끼 챙겨주랴 매일매일 정신이 없기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등산로를 찾지 못해서였다. 틈틈이 산 언저리를 살피며 등산로를 찾아보기는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먼저 살 던 동네에서는 등산로가 집에서 십여분 거리에 있어서 오가기가 편했다. 산과 가까이하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등산로가 없어 산을 못 오르고 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이러다 시간만 가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등산로를 찾아 나선 날이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던 중에 저 멀리서 젊은 여자 한 분이 아이 셋을 데리고 산을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쪽에 등산로 있을까.’ 헐레벌떡 달려가 보았다.
이 쪽에 등산로가 있나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이 엄마가 너무 미인이라 좀 놀랐다. 봉긋한 이마에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에는 검붉은 루주를 칠한 얼굴. 어쩐지 애셋을 데리고 산에 오를 얼굴 같지 않았다. 산에 오르는 얼굴이 따로 있겠냐마는 적어도 이 여자분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확히 장소를 짚자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이 어울린다고나 할까.
네. 등산로예요. 이 길 끝까지 가면 애기봉까지 갈 수 있다는데 거기까지는 가보지는 않았어요.
아이 어마가 활짝 웃으며 말해주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크게 미소 지으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큰 미소에 대한 화답으로 나는 더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럼 몇 시간 정도 걸릴까요.
아이엄마가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말해주는데 옆에 있던 남자애들 중 제일 큰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모는 누구예요?
산 중에서 만난 소년으로부터 자네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받으니 정말 나는 누구인가라는 성찰에 들어갔다는 건 거짓말이고, 여기 이사 온 사람인데 등산길을 찾는 중이라고 말해 주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로 큰 남자애가 뒤이어 질문했다.
어디로 이사 왔어요?
저 산밑이라며 우리 집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아이엄마와 아이들 셋이 내가 가리킨 데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우리 집을 정말 찾아보려는지 열심히 그쪽을 바라보는 일가족을 보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생각했다. 초면인 가족과 등산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때 가장 작은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요.
이번에는 모두들 그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얘는 또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걸까.
저 아까부터 똥이 마려웠어요.
어? 정말?
놀란 아이엄마와 내가 동시에 물었다. 아까 화장실 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아이는 쉬야만 한 거라고 답했고, 도저히 안 되겠느냐는 엄마의 낙심 섞인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아이의 급똥을 해결하기 위해 산아래로 발길을 돌리는 가족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압구정동이 어울리는 여자분이 알려준 대로 산길을 올라가 보았다. 야산에 간신히 난 산길이었다. 길이 너무 좁아 누가 내려오기라도 하면 길 한편으로 비켜줘야 할 정도였다.
등산로가 여기밖에 없다면 이 길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야겠지만 매일 등산길로 삼기엔 답답하고 등산객 또한 너무 없는 길이었다. 사람이 너무 없으면 무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일단은 등산로 위치를 발견한 정도로만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키지가 않아서인지 이후로도 선뜻 길을 나서지 않게 되었다.
제대로 된 등산로는 더 멀리 있을 거 같다는 짐작 속에 다시 며칠이 흘렀다. 등산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쌓이는데 어쩐지 그 등산길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은 마치, 같은 커피가 나와도 내가 마음에 드는 분위기의 카페를 단골 카페로 삼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하겠다. 아무리 커피가 맛있어도 사장님이 어딘가 불편하다면, 인테리어가 내 취향이 아니라면 다른 카페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외출 후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 한 등산객이 통화를 하면서 우리 집 뒤편 골목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 골목으로 들어갈까 싶었다. 그 골목길은 내가 알기에 막다른 길로, 배 밭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립식 창고만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배낭을 메고 등산스틱까지 든 걸 보면 분명 등산하려는 복장인데,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등산객의 뒤를 따랐다.
이쪽에 등산로가 있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분이 내내 통화 중이어서 미행하듯 뒤만 따랐다. 1분 여쯤 배 밭을 돌았을까. 구석진 곳에 ‘등산로’라고 써진 낡은 입간판 하나가 서있었다. 등산객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입간판 옆의 사잇길로 걸어 들어갔다.
입간판이 아니었으면 전혀 몰랐을 만큼 좁은 길이었다. 그 길을 빠져나가자 갑자기 나는 산 중에 서있게 됐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높은 나무가 우거진 깊고 큰 숲이 내 앞에 우뚝 서있었다. 홀린 듯 산을 훑어보는 사이 등산객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안내하고 사라진 회중시계를 든 흰 토끼처럼.
흰 토끼가 갔을 법한 길을 찾다가 곧 등산로를 발견하고 쭉 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이 엄마가 가던 등산로 보다 훨씬 넓고 주변 풍경이 좋은 길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저편으로 우뚝 솟아 있는 불암산도 감상할 수 있었다. 너무 가파르지도, 너무 완만하지도 않은 산길은 숨이 약간 가빠질 정도의 딱 좋은 굴곡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3월의 온화해진 기온과 함께 피어오르는 흙냄새를 맡고, 빽뺵하게 올라온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의 모양새를 감상하고 동시에 작은 풀꽃들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이 걸었다. 얼마쯤 올랐을까. 겨우 20분도 안 올랐는데 ‘애기봉’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그 여자분이 말한 애기봉이 우리 집 뒷산을 말한 것이었다.
조금 더 오르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커다란 돌이 턱턱 쌓여있었다. 산신령이라도 나올 듯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돌산을 올랐는데 예상외로 금방 정상에 이르렀다.
아 그래서 애기봉이라고 하는구나.
봉우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사 오기 전의 뒷산 정상은 아파트와 집들로 빽빽한 서울 특유의 풍경이었는데 여기서는 논밭, 동산, 빈 땅도 보이고 저 멀리에는 작은 집들과 아파트까지 모든 풍경이 골고루 함께 했다. 하늘은 어떤가. 목화솜 같은 구름으로 한가득 찬 하늘이 넓게 뻗어 있었다. 맑고 투명한 파랑과 하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량해졌다. 사방에서 나에게로 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 등산로라면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겠다.
파랑새는 바로 내 집 뒤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