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다.
산골살이의 절정은 지금 바로 이 시기, 새잎 돋는 시기일 것 같다. 능선마다 일렁이며 퍼지는 연두의 바다를 지켜보는 것은 산에서 사는 자의 특권이자 의무와 같은 것이다. 나는 어떤 사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연두의 성장을 지켜보는 중이다. 건강을 위해 2년 전부터 산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봄은 생각보다 천천히 오고 천천히 간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꽃이 피어서 돌연 봄이 왔고, 더워지면서 봄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한결 부드러워진 2월의 바람과 함께 봄은 천천히 오기 시작한다. 검게 말랐던 나무의 색이 변하고, 흙이 수분을 머금어 촉촉해질 때부터 연두는 이미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된다. 산 옆에서 살게 되면 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2월 중순에 이사를 오고 짐들에 치여 고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히 동네 개울가의 나무를 쳐다봤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뭇가지마다 맑은 연둣빛 새순이 엄지손톱만큼 쑥 올라온 상태였다. 봄의 첫 순간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도시도 아닌 산중에서.
놀란 나는 직무태만으로 걸린 경비원처럼 온 동네를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며 나무마다 맺힌 새순의 정도를 확인하고 봄이 얼마나 왔는지 가늠했다. 산언저리의 꽤 많은 나무들이 이미 새잎이 속속 올라온 상태였다. 나의 준비됨 여부에 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성큼 와버린 것이다.
속상한 걸 생각할 겨를도 없다. 봄이 왔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봄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잎 돋는 산언저리에서 이미 와버린 봄을, 골짜기와 개울에 비치는 연두의 빛을, 열심히 바라보고 기꺼이 마음을 빼앗긴다.
드문드문 올라오던 새순들은 3월 셋째 주 즈음부터 한꺼번에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가장 좋아하는 색이 연두색이고, 온천지가 이 신생의 색이 되니 마치 초콜릿 나라에 온 아이가 된 기분이다. 그것도 반짝이는 연두이다. 나뭇잎이 일 년 중 가장 예쁜 색으로 빛난다.
이 연두에서 층층이 초록으로 이르는 스펙트럼을 그저 푸른 산이라고 표현 하기에는 다소 둔한 느낌이다. 흰빛이 도는 연두, 노란색이 살짝 섞인 연두, 완두콩 그 자체의 연두, 올리브가 연상되는 연두, 희뿌연 연두 등등. 봄산은 연두로 울긋불긋하다.
'울긋불긋'이라는 말은 단풍이라는 말과 관형어구처럼 붙어 써서 마치 붉은색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말 같지만 사전적 의미는 '짙고 옅은 여러 가지 빛깔들이 야단스럽게 한데 뒤섞인 모양'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봄산도 울긋불긋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봄의 산은 야단스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노랑과 빨강, 완전히 다른 색으로 섞인 가을산은 그러한 분위기가 있지만 봄의 산은 연두색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나무들마다 저 안에서 끌어낸 연두는 봄빛을 받아 다채롭게 빛나고 봄바람이 불 때마다 뒤집히며 또 다른 연두의 향연을 만들어낸다.
나는 봄이면 항상 가슴 한편이 뻐근하게 아팠는데 그것은 아마도 연두를 충분히 보지 못해서 일 것이다. 도시에서 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짧기만 하다. 봄의 기승전결을 알 수 있는 곳들이 적어서이다. 시간만 짧은가. 빌딩들에 의해 겨우 볼 수 있는 조각하늘처럼, 가로수길에 놓인 또는 공원에 조성된 몇십 그루의 나무만으로 봄의 절정을 찰나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새 잎 돋는 연두의 봄은 도시에서도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어쩌면 다시 다시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마음이 시큰했다.
불치병 같던 가슴통증이 올봄에는 오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고 나서야 봄을 하나의 계절로서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연두에 기대서 본 4월의 풍경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