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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un 13. 2024

한창 때 산밑에서 산다는 건.


부모님을 뵙기 위해 동생과 서울을 다녀왔다. 나는 장롱면허이므로 베스트 드라이버인 동생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로 이동할 일이 있으면 운전은 언제나 동생의 몫이다.

”나는 전생에 언니의 말이었나 봐. “

나를 위해 자주 운전대를 잡아야 했던 동생이 뼈 있는 농담을 날렸다.

“그러게. 내가 빨리 운전을 배워야 하는데.”

내가 미안한 얼굴로 말하자 동생은 얼른 아니라고 답한다.

“여기 지리도 잘 모르잖아. 그리고 운전 초반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데. 이왕 늦은 거 완치 판정받고 시작해."


운전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항상 납작해진다. 수년 전, 장롱면허 신세를 벗어나고자 연수를 새로 받고 운전대를 잡았는데, 정작 도로에 나가보니 모든 차들이 나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식은땀이 쭉쭉 났었다. 사람 목숨 모두 하나라고, 갑자기 내 차를 박고 자신마저 다칠 일은 만들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봐도 소용없었다. 맞은 차선에서 씽씽 달려오는 차와 꼭 정면출동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고 경험도 없으면서 마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뚜벅이로만 살 수는 없는 문제이다. 게다가 여기 산밑은 모든 곳과 거리가 멀어서 차 없이는 살기 힘든 곳이다. 살려면야 살 수 있겠지만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지인이 그곳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예쁜 무인도에서 사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산도 나무도 꽃도 예쁜 곳인데 발 묶여 무인도에 갇힌 느낌이라고.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연예인 김나영 씨의 미국 여행기를 본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한 숙소에 아이들과 머물게 되었는데, 넓은 평야에 숙소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창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사람들과 부대끼다 온 도시인에게는 그 여유로움이 좋을 법한데 그녀는 첫날밤부터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울상을 지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말이다.


다음날 식사를 위해 사람들이 복잡한 시내로 나가서야 비로소 웃는 얼굴이 된 그녀가 말했다. “아, 이제야 살 거 같네요. 사람들 많으니까 너무 좋다!” 그녀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사람들이 날 살려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살 것만 같은 기분.


서울에 진입하고 친정이 있는 구시가지에 들어선 순간 그런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안정감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오랜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진 것과 같은 평안함이었다. 오래된 고가도로, 그 밑을 따라 줄지어 자리 잡은 작고 어수선한 상가, 무심한 표정으로 걷는 사람들, 특별할 것도 없는 비슷비슷한 건물들. 아름다운 요소는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빛바랜 도심이건만 무엇이 이리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익숙한 것만 찾고, 익숙한 것만 믿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친정에 간 김에 몇 가지 볼일을 보느라 은행과 병원 등을 다녔다.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점점 코와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은 기분에 미세먼지가 많은 날인가 싶었다. 앱을 켜보니 '보통'이라는 알림이 뜬다. 이렇게 공기가 탁한데 보통이라니. 담배 냄새는 또 왜 이리 독한가. 사람들 많은 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내가 이미 좋은 공기에 익숙해졌음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했을 도시의 공기가 이제는 예민하게 후각을 건드리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는 얼굴에 먼지 가면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모든 볼일을 마치고 역시 동생의 차를 얻어 타고 돌아왔다. 동네에 진입하니 저 멀리 돌산과 그 밑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도 북한산, 인왕산 등 여기저기에 산이 있지만 이곳 산세는 유난히 곱다. 차분하고 속 깊은 여성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 떠오른다. 개울가를 따라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길게 늘어선 큰 금계국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이 동네는 참 매일매일이 예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에게 동생이 여기서 오래 살 거냐고 묻는다.

“아직은 모르겠어. 여기는 행복하면서도 너무 외로워. 바쁜데 이상하게 심심해. 불편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데 희한하게 모든 게 너무 좋아.”

내 말에 동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민자 같네. 외국에서는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오면 외국에 돌아가야 할 것 같고. “




산밑으로 이사 온 지 넉 달이 되어간다. 전원생활 비스므리한 환경이다. 집을 알아볼 때 부동산 사장님께 이 동네는 어르신들이 많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병원이랑 인프라 갖춰진 곳에서 살고 싶어 해서 이런 외진 곳은 찾지 않아요. 조용하게 아기 키우고 싶은 젊은 부부들이 오히려 많죠."


지내보니 역시 그러했다. 병원은 물론, 뭐 하나 사려고 해도 한참을 나가야 하니 기동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이 지내기에는 힘든 곳이다. 인터넷 장보기는 필수이다. 필요한 것들을 냉장고와 팬트리에 꼼꼼하게 갖춰놓는다 해도 생활하다 보면 뭐 하나 부족한 경우가 안 생길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멀리까지 나가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며칠 전에 불고기를 만드는데 문득 깻잎을 듬뿍 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시 같으면 집 밖만 나가도 도처에 마트가 있을 터이나, 여기서는 깻잎 하나 사자고 20분을 걸어 나가야 한다. 돌아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왕복 40분이다. 그냥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데 이런 식으로 별 거 아니지만 참고 넘겨야 할 게 줄줄이 사탕으로 은근히 많다는 것이다.


한 번은 속이 더부룩하고 먹은 것이 영 내려가지를 않았다. 소화제 한 병 마시면 될 거 같은데, 약통을 보니 마지막 한 병을 누가 먹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활명수 한 병 사자고 불편한 배를 잡고 40분을 걸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와다. 그냥 누워서 속이 가라앉기를 참으며 넘겼다.


교통이 불편해 원하는 곳에 나가기도 사람들 만나기도 여러모로 불편하다. 나이 들면 공기 좋은 곳에서 한적하게 살겠다는 것은 도시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인 줄 여기 와서 깨달았다.


하지만 맑은 산공기와 초록의 나무가 주는 힘에 둘러싸여 살아본 적이 있다면 이 매력을 완전히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개안이 저절로 되는 초록의 나무와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일몰, 무성한 풀과 꽃,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게 된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이곳을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연이 주는 귀한 에너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라도 5도 2촌의 삶을 선택하는구나 싶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세수를 했다. 잠자기 전 샤워를 하고 산뜻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드는 걸 좋아해서 세수를 미리 하지 않는 편인데, 도저히 밤까지 먼지 가면을 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베란다에 나가보니 돌산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과 아주 멀어진 기분이 든다. 지겨운 것과 가슴 뛰는 것에서 모두 멀어진 기분. 그저 고요만이 있다. 솔솔 부는 산바람이 스쳐가며 말을 거는 것 같다. 가만히 옆에 있어주겠다고, 그러니 웬만하면 오랫동안 잘 지내자고. 오늘은 바람의 말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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