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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Aug 21. 2024

다들 집 앞에 터널 하나쯤은 있잖아요.

지난 5월 19일 ‘산 밑까지 왔는데 공사장이 뷰라니’ 주제의 글을 올렸다. 요약하자면 좋은 공기 마시고 산도 보며 살자고 불암산 바로 밑까지 올라왔는데 공사장 뷰가 웬 말인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 석 달이 흘렀다. 한 달 전에 가림판을 떼어내길래 공사가 드디어 마무리되나 보다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지난 7월 중순,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공사는 끝날 기미가 없더니 8월 중하순으로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원래는 3월에 끝난다고 했다). 30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에 바깥나들이도 쉽지 않아 온종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 공사소리에 거실문을 닫으면 아이들은 덥다고 난리,  문을 열면 시끄럽다고 난리, 결국 아침부터 저녁까지 에어컨을 풀가동 시켰으니 이번달 전기세 고지서 날아오는 날이 두렵기만 하다.


해외출장 중인 남편이 휴가를 받아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 말은 “공사 아직도 안 끝났어?”였다. 공사가 연기되는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어쩐지 나무라는 투로 느껴졌다. 이 집을 구할 때 남편은 해외 근무 중이어서 친정 식구들이 남편을 대신해 발품을 팔아줬다. 이쪽에 미리 이사 온 동생이 부동산 아저씨와 다니며 괜찮은 집을 선별하면 주말에 엄마와 나, 막내 동생이 그 집들을 둘러보는 식이었다. 산 바로 밑에 자리 잡은 집은 딱 이 집 하나였고, 나름 괜찮은 것 같아 최종적으로 지금의  집을 선택했다.


결정하기 전, 남편에게 집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집이 너무 좁다는 이유였다. 34평이지만 복층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한 층이 17평, 아무래도 먼저 집보다 좁게 느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폭이 좁았다. 산 바로 밑에 나온 집이 이 집 밖에 없었기도 하고, 집마다 단점들이 하나둘 씩은 있었다. 거실이 환하면 다른 방이 어두워서 낮에도 불을 켜야 하거나, 구조가 괜찮으면 창밖이 다른 집 벽에 나있어 실내 전체가 컴컴했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집은 없었고, 최선은 못해도 나름 나쁘지 않은 차선으로 선택한 집인데 남편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집이라 그런지 내내 못마땅하다는 태도였다.




2층 거실에서 남편과 빨래를 널고 있는데 포클레인이 집 앞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갔다.

“와, 손 뻗으면 닿겠다. 이게 뭐냐. 여기까지 와서 공사장이나 보고.”

남편의 탄식에 “그러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이 길어지면 인내심을 잃을 것 같아서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나 없이 집구하느라 애썼어.”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람 마음 다 내 마음 같지 않고, 그도 나름의 불만과 인내가 있을 것이다. 완벽한 집도 완벽한 사람도 없다. 그저 좋은 점을 바라보며 사는 게 태평하고 온화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일단 여기는 내가 본 공사장 중에서 산을 배경으로 한 가장 아름다운 공사장이다. 그리고 옆 집 상황보다 보다 낫기도 하다. 옆 집의 앞에는 공동주택용 쓰레기수거함이 있다. 그 집도 산 밑까지 왔는데 거실 밖이 쓰레기통 뷰이니 둘 중에 선택하라면 우리 집이 백배 나은 듯하다.


그러나 저러나, 가림판이 떼어졌을 때 놀란 것이 있다. 산 아래에 만들어 놓은 터널이었다. 도로도 없는데 산 중에 왜 터널을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지금 공사가 끝나면 집이 올라간다고 하니 앞으로도 아름다운 전경을 보기는 글렀지만 커다란 터널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아랫동네에 새로 생긴 지하철역 대피 장소로 쓰일 터널이라고 했다. ‘대구지하철화재사건’처럼 큰 사고가 생겼는데 지상으로 바로 대피하지 못할 경우 지하 터널을 통해 산 밑, 그러니까 우리 집 앞에 뚫린 터널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글바글 터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올 모습을 상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3주 간의 여름방학이 드디어 끝나고 아이들이 빠져나간 아침, 나는 믹스 커피 한잔을 들고 거실에 앉아 멍을 때렸다. 불멍, 물멍, 여러 멍이 있지만 우리 집에서만큼은 공사장멍이 제일 잘 어울린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천천히 땅을 파는 포클레인을 보며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


“원인 모를 지하철 사고에 사람들이 터널 쪽으로 대피한다. 그런데 지하에서 이동하는 사이 지하철사고와 함께 강력한 바이러스가 지하에 퍼지게 된 사실을 알게 되고 정부는 일단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터널 입구를 막는다. 그 안에서 감염된 사람과 감염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려는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한쪽에서 모두 감염자로 봐야 한다며 터널을 봉쇄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아니면 로맨틱으로 가볼까.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구상해 본다. 무언가 이어질 듯하기도 하고,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날아갈 것 같기도 하다. 그 간의 고생이 보람되게 하려면 이야기라도 남겨야 할 것 같다


문득 매미의 울음소리가 예전만큼 맹렬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은  여전히 위협적일 만큼 뜨거웠지만 터질듯했던 여름의 에너지가 한풀 죽은 느낌이다. 절정의 장면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천천히 사위어 갈 일만 남았다. 이곳에서의 첫여름, 한 계절을 이렇게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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