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한 롤의 36장짜리 사진이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필름 카메라 필름을 잃어버렸다.
9월 내 생일부터 한 달 정도 틈틈이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데 어제 술 마시고 새 필름으로 갈아 끼우다가 어디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오늘 아침 술인지 잠인지 모를 것에서 깨자마자 어제 들고나갔던 가방으로 돌진했다.
가방을 열기 전부터 오금이 쩌릿쩌릿한 게 그 느낌이... 뭐랄까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으악'이었다.
가방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본 뒤 필름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것 봐 이럴 줄 알았다고 으악' 했다.
뭐지. 나 사실 어제 취한 중에 필름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나.
흐릿한 기억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모아 여며보니 술 자리를 뜨기 전 같이 술 마신 동생이 "누나 이거 안 챙겨요?"하며 작은 물체를 건넸는데 "그건 버려버려!"라고 대답했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거 혹시 필름이었을까?
택시에서 내릴 때 친구에게 전화해서는 "나 택시에 뭐 놓고 내렸을 수도 있는데 집에 가서 확인할 거야"라고 말했다는데. 혹시 놓고 내린 게 필름이었을까?
나 술에 취하면 아무 데나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다니는 그런 애였나?
그 필름에 어떤 사진들이 있었더라.
내 생일 서촌 거리를 걸으면서 친구들과 몇 방.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헤어진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며 목을 놓아 울 때 놀리면서 몇 방.
고향집 강아지가 햇빛을 받으며 나른하게 졸고 있는 사진 몇 방. 아 귀여웠는데..
추석에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들과 부모님 사진 몇 방.
서울에서 놀러 온 연예인 친구 사진 몇 방.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신 동네 언니 취한 모습 몇 방.
대강 기억을 훑어보아도 이런 식으로 버려졌으면 안 됐을 추억들 뿐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서 하루 종일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 슬픈 소식을 필름을 함께 채운 친구들에게 알렸다.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나는 하등 쓸모없는 인간이야' 하며 자책했다. 친구 몇이 '응 맞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이상하게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죽을 때까지 그 필름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금방 다시 가슴이 아리긴 했지만.
필름 한 롤의 36장짜리 사진이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휴대폰을 몇 번이고 갈아 치우는 동안 단 한 번도 백업한 적 없어서 날린 사진만 수 만장인데
그렇게 추억에 야박한 내가 고작 서른몇 장의 상실에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게 황당하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이불을 걷어차 버릴 만큼 아까운 순간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외국에서 만난 친구와 페이스북을 교환하지 않은 것
술김에 아르바이트생한테 엄청난 현금 팁을 준 것
초등학교 때 꽤 친했던 남자애한테 고백을 해버린 것 등.
오늘로서 하나 더 추가되겠다. 술 먹고 필름 잃어버린 것.
차라리 그 필름이 불량품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카메라 노출이 안 맞아서 제대로 나온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면 내 필름을 주운 사람이 호기심에 필름을 스캔해보고 SNS에서 우연히 나를 찾아 DM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냥 어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어젯밤 술김에 필름을 먹어버린 거였으면 좋겠다. 내년 건강 검진할 때 X레이를 찍다가 찾거나 아니면 내일 아침 똥으로 나와버렸으면 좋겠다.
온통 다 될 수 없는 것들만 바라고 있으려니 다시 오금이 저릿저릿하다.
이럴 땐 누워서 오금 부근이 짱짱해지도록 다리에 힘을 주어서 이불이나 뻥뻥 걷어차야 한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좋은 방법이 사실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지.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을 후회하느라 힘이 들 때 먹을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과에 갔어야 했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