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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Oct 03. 2018

고맙긴 한데..

똑똑한 고백과 멍청한 거절들이 오간다.

‘고맙긴 한데..’

최악의 말로 첫마디를 꺼냈다는 걸 깨닫고는 아차 싶어 말꼬리를 늘인다.

그래도 이미 뱉어버린 말이라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당황한 마음이라도 주섬주섬 챙겨 감추고

잘린 말 토막을 마저 이어 나가본다.

‘고맙긴 진짜 고마워.’

세상에, 덧붙인 말조차 어쩜 이렇게 별로일까.     


좋은 친구가 느닷없이 나를 좋아한단다.


걔가 또박또박 말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순식간에 뭉개져 반대쪽 귀로 데굴데굴 굴러 나간다.

나는 바로 직전에 놓친 말들을 다시 추려서 이해해 낼 정신이 없으므로 차라리 한 번 더 물어본다.

‘그래서 뭐라고?’


걔가 말을 하는 내내 여러 개의 좋은 기억들과 수 백 가지의 안 좋은 만약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걔 말은 아까 전에 끝이 났고,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한다.

걔는 내가 할 말이 없는 줄을 알아서 내가 할 말을 만들 때까지 더 길게 침묵한다.


나는 아무 말이라도 해서 이 벅찬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은 아니야’

나는 내가 뱉은 아무 말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경악한다.

구리고 식상하고 거지 같은 말을 뱉고 말았구나 생각하는데 반대편의 걔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오..역시 클래식이 최고인 걸까...?

살짝 안도할 찰나에 걔가 ‘네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은 뭔데?’하고 묻는다.

나는 또 왜 내가 생각하는 나쁜 인간형에 대해 쓸데없이 열심히 말하고 있나. 당황해서지 뭐.

내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의 유형을 열 가지 정도 주절주절 읊고 나니 잠자코 듣던 애가 묻는다.

‘너는 그런 사람이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럼 너는 좋은 사람이네’라는 대답을 걔한테서 듣는다.

아, 나는 좋은 사람이었나?     


똑똑한 고백과 멍청한 거절들이 오간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분명 많이 웃을 거야, 집에 가서 생각해봐도 웃겨서 자기 친구한테도 말해주겠지.

      

걔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나는 걔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그러려면 물어봐야 한다. 그래서 너는 내가 왜 좋으냐고 묻는다.

걔는 조금 생각하다가 나랑 밤새워 술을 마셔도 재미있어서 좋다고 대답한다.

나는 걔 말을 듣고는 진짜로 약간 웃겨서 ‘야, 내 남자 사람 친구들은 다 나랑 새벽까지 즐겁게 술 마셔’라고 대답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걔랑 밤이 늦도록 술 마시는 게 재미있다.

가식 없이 소탈한 성격이나, 아! 다정한 그 애 말투도 좋다.

난데없이 또라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좋다. 싫은 점 없이 사실 다 좋은데 그냥 친구로서 인걸 어떡하나.

훌륭하고 예쁜 친구다.


근데 걔는 저런 이유들 때문에 내가 좋다고 한다.     

어째서 같은 모양의 순간에 쌓인 느낌이 이렇게나 전혀 반대 방향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좀 전보다는 훨씬 현명한 문장으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너랑 키스하는 걸 상상하면.... 으 정말 너무 이상해서 상상이 안 가,

너랑 잠도 잘 수 없을 것 같아’하고 말한다.

걔가 당황하면서 왜 그런 걸 상상하느냐고 묻길래

나는 ‘안 해봤으면 한 번 해봐. 나랑 키스하는 상상이랑 잠자는 상상 해봐 영판 아닐지도 몰라’ 하고 대답한다.

걔가 어이없어하면서 ‘네 앞에서 그런 상상을 하란 말이야?’하기에

나는 ‘그러면 집에 혼자 있을 때 해봐’라고 한다.

걔는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그렇긴 하다. 아무튼 요지가 그게 아니잖나.     


걔랑 이런 황당한 얘기를 하고 있자니 다시 좀 편안해져서 걔가 알지 못하는 내 경험을 몇 개 더 얹어본다.

‘나는 남자 사람 친구들이 꽤 있는데, 그중 몇 명이 나랑 안지 한참 돼서야 그때 사실 나를 좋아했다고 말한 적이 여러 번 있어’ 걔가 그랬냐고 묻는다.

나는 ‘너도 그런 걸 거야,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서 착각한 걸 거야, 어쨌든 이렇게 예쁜 마음을 가져줬다니

진짜 고마워.. 고맙긴 한데..’

나는 속으로 아차 싶은데 걔는 그냥 웃는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장황한 이유를 붙여 거절의 말을 하고,

걔는 갈피 없이 튀어 오르는 내 말들을  여태껏 본 적 없는 침착한 태도로 들어준다.


그래서 결론은

그래 뭐 일단 같이 더 놀아보자. 계속 재미있게 놀다 보면 네가 오늘을 죽을 만큼 쪽팔려하거나,

아니면 내가 너랑 키스하는 상상을 하게 되거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모레 보자. 그때는 술 말고 커피나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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