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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an 29. 2019

너무 값싼 숙소는 숙소가 아니었음을..

이렇게 좋은 방(?)이 아까 먹었던 피자 한 판 보다 싸단 말이야?!

스물셋, 건강하고 겁 없었던 나의 여행 스타일은 비싼 데서 배 터지게 먹고, 싼 데서 아무렇게나 자는 것이었다. 나는 한 끼에 20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배를 채운 후 버스 터미널에서 집시들과 잠을 자는 용감하고도 미련한 놈이었다. 왜 이렇게 숙소에 돈 쓰는 게 아까웠는지, 하룻밤 숙소비는 20유로 이하여야 한다는,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나만의 철칙을 무식하게 지키며 열 명 남녀 혼숙 도미토리 방이 아니면 검색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깡으로 고시원, 반지하, 옥탑방을 10년째 전전하면서도 행복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3년, 생일을 맞아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를 2주간 혼자서 여행하였다. 

대략 이백여 가지의 크고 작은 해프닝 끝에 (히드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로마에서 미친놈에게 쫓기고, 베네치아에서 생일이 같은 남자애를 만나고, 플리트비체에서 길을 잃고 산을 타다 구조되고, 두브로브니크에서 실수로 갈매기를 잡는 등의 해프닝들)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자다르라는 도시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는데, 엄청난 길치 주제에 혼자서 여행을 해냈다는, 

그리고 많은 것을 잃거나 도둑맞았지만 가장 귀중한 목숨만은 건졌다는 뿌듯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와 하루 종일 감성에 젖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자다르의 명소인 바다 오르간에 앉아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일기를 쓰고 있자니 무척이나 행복했고 배가 고팠다. 지갑을 확인해보니 크로아티아 화폐인 쿠나가 꽤나 많이 남아있었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까, 당연히 먹는데 써야지! 


자다르의 골목들은 굽이굽이 아름다웠고 식당이 참 많았다.

바다를 향해 테라스가 펼쳐진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양파수프와 문어 샐러드, 루꼴라가 잔뜩 올라간 화덕피자 한 판과 해산물 파스타를 주문했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이 살랑이는 테라스에 앉아 혼자서 메뉴 네 개를 펼쳐놓고 먹는 기분은 아주 조금 창피했고 아주 많이 행복했다. 

집안 자체가 워낙 대식가인지라 메뉴 네 개정도는 가볍게 비워낼 수 있었다. 

접시를 싹싹 비운 후, 팁까지 두둑하게 계산을 한 후, 

근처의 조그마한 커피숍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따뜻한 커피와 달달한 케이크를 먹었다. 

좀 전에 먹은 것들이 뜨거운 커피에 녹아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와 바다 오르간에 앉아 노을을 구경하였다.

잔잔한 물결에 반사되었다가 금세 부서지는 금빛 노을들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고, 또다시 배가 고팠다.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의 식당들이 테라스의 장식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노을 속의 광장은 몇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가볍게 몸을 흔들며 술을 한 잔 곁들이는 각국의 연인들이 테라스들을 메우고 있었다. 

나도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남은 돈을 모조리 털어 와인 한 병과 스테이크, 해산물 그릴 요리를 주문하여 천천하고 행복한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든든하게 배가 부르니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으므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미리 예약해 둔 싸구려 숙소로 향했다.      


낡디 낡은 숙소의 얇디얇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짝거리는 북유럽 남자애들 9명이 웃통을 깐 채로 나를 반겨주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완벽한 마무리라고?! 이렇게 좋은 방(?)이 아까 먹었던 피자 한 판 보다 싸단 말이야?!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긴 9명의 남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너희들의 몸은 너무 커다래서 이 작고 낡은 침대에 제대로 눕힐 수 없어 보인다는, 

어깨가 아주 대단하구나!라는 부끄러움을 상실한 농담들을 술김에 내뱉다 보니 이제는 불을 끌 시간이었다. 

진한 아쉬움을 티 내며 요정 같은 푸른 눈의 남자들에게 good night을 고하고 내 침대에 올라가 잠을 청하였다.     


한참을 자다가 이상한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뿡’

내 방귀소리였다. 

젠장, 들었을까? 저 아름다운 아홉의 요정들이 내 방귀소리를 들었을까? 

아니야, 못 들었을 거야. 나는 방귀소리가 아닌 척 괜히 이불을 부스럭거리고 입으로 뿌붑 소리를 내었다.

한참을 뒤척거리다 정신승리를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뿡’

또 내 방귀소리였다. 

소중한 마지막 날을 과식으로 보낸 대가인가. 뱃속이 미처 나가지 못한 가스들로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만 내가 지금 몇 번째 방귀를 뀌고 있는 거지, 설마 자는 동안 계속 뀐 거 아닐까.     

끔찍했다. 아까 쟤들이 나에게 건넨 칭찬들이 떠올랐다. 

‘너 틴에이저 같아’ ‘어려 보여!’ ‘귀여워.’  

내 방귀소리는 하나도 귀엽지 않은, 크고 시끄럽고 흉한 어른의 방귀소리였다. 

쟤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오, 나 어떤 코리안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잤어, 자는 동안 방귀를 계속 뀌더라니까!’라고 말하는 장면들이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선명했다.


쟤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진 못하더라도 뻑킹 코리안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귀를 참으며 밤을 지새울 것인가, 아니면 화장실에 가서 장을 비우고 올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이 긴 밤을 뜬 눈으로 괄약근을 조절하며 지새울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또다시 까무룩 잠에 들고 말 것이고 내 우렁찬 방귀 소리에 놀라 눈을 뜨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푸른 눈의 요정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2층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침대 위를 기어가 사다리를 밟으니 귀를 찢는 쇳소리가 총성처럼 울려 평화로운 고요를 헤쳤다. 

젠장. 

내 아래층에서 자던 애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소곤소곤 ‘쏘리, 쏘리’를 외치며 급하게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개 후져 터진 숙소는 화장실도 가관이었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쇠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기괴한 소음을 만들었다. 차라리 방과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했다면, 아니 차라리 야외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화장실은 방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당최 이게 무슨 해괴한 배치란 말인가. 


변기에 앉아서 지나치게 얇아 보이는 벽을 노려보았다. 방음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재채기를 한다면 이 벽 건너편의 누군가가 'bless you'라고 말해 줄 것이 거의 확실했다.

이 얇은 벽 너머에서 9명의 요정들이 자고 있었다.     

나는 요정들의 숙면을 염려하며 조심조심 거사를 치렀다. 새벽 두 시였다. 

모두가 깊이 자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거야.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화장실 문을 잡아당겼다.

‘꺄---각’

비명소리 같은 마찰음이 들렸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둡고 선명한 불행이 가슴을 짓눌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화장실 문을 잡아당겨보았다. 

‘꺄---각’

머릿속에 물음표 백여 개가 쏟아지다 거대한 느낌표가 쿵 하고 자리를 잡았다.

나, 갇혔구나.

조심조심 문의 아귀를 잘 맞춰보려 흔들어보았다. 시끄러운 소음만 날 뿐 절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개 후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튼튼한 문이었구나. 쓴웃음이 나왔다.     

5분 정도를 혼자서 분투하는데 바깥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Are you okay?" 

같은 방 남자애였다.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괴물에게 잡혀 갇힌 공주도 아니고, 똥 싸다 스스로를 가둔 멍청이를 구하러 온 요정에게 눈을 질끈 감고 속삭였다. 

“help me.."     

나와 그는 문을 사이에 두고 어긋난 잠금쇠를 어떻게든 맞춰 열어보려 했지만 야속한 문은 그럴수록 더 단단하게 꽉 맞물렸다. 


요정이 한숨을 쉬더니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였다.

“hey guys! wake up!"      


할 수만 있다면 변기에 스스로를 내리고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아까 그 똥이었다면,, 그 똥이 지금의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순식간에 화장실 문 앞으로 남자애들이 모였다. 우리는 힘을 합쳐 문을 열기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문에게 아까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보았지만 문은 단단히 닫혀 열리지 않았다.     


자못 심각한 톤으로 웅성대던 남자애들이 나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외쳤다. 

서, 너 걸음 뒷걸음질을 치니 콰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자애들 두, 세 명이 튼튼한 어깨를 부딪쳐 열어 준 것이었다.

웃통을 깐 채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들이 열린 문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Are you okay?!"     

속으로 대답했다 아임 낫 오케이..


차라리 나를 비웃었으면 나도 함께 호쾌한 척 웃기라도 했을 텐데, 그들은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나의 상태를 걱정하였다. 그중 한 명은 있지도 않은 나의 폐쇄공포증을 염려하며 그 안에서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두렵지 않았다고, 진짜라고 진짜 진짜 괜찮다고 말한 후에 겨우 내 침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불을 박차고 도망치듯 숙소를 빠져나왔다.     


이따금씩 나는 궁금하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향기만 남기고 떠나간 묘령의 동양 여인..? 은 못 되더라도 뻑킹 코리안만은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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