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즈음의 여탕엔 우리 둘 뿐이었다.
금요일 밤인데 박이 집에 있었다.
편한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못생긴 뿔테 안경을 쓰고 TV를 보고 있는 박의 모습이 익숙하고도 뜻밖이어서 반가웠다.
함께 사는 박과 내가 금요일 밤에 집에서 만나는 것은 요즘 들어 특별한 일이 되었는데
나는 금요일마다 있는 녹화 때문에 다음날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고, 박은 익산에 있는 애인을 만나러 금요일 퇴근 후 지방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요일 저녁에 거실에서 헤어져 각자의 주말을 보내고 사흘만인 월요일에 현관에서 만나 반가워한 지가 꽤 되었다.
퇴근 후 지친 표정으로 고등 래퍼를 보고 있는 박에게 맥주 한 잔 할까 하고 물어보았다.
박은 그럴까? 하며 소파에서 등을 떼다가 이내 너무 피곤하다며 다시 소파 속으로 푹 꺼졌다.
사실 나도 12시간짜리 녹화를 마치고 온 터라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박의 거절이 내심 다행스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함께하는 박과의 금요일 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는 아쉬웠다.
나는 박에게 목욕탕에 가자고 말했다. 박의 눈이 반짝였다. 박이 학창 시절 매주 목욕탕에 가던 목간 마니아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이 ‘그런데 너무 피곤해.’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목욕탕에 가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있잖아, 절절 끓는 온탕에 몸을 푹 담그는 거야, 그럼 진짜 온갖 피로가 다 풀릴걸.
따뜻한 물에 발끝부터 어깨까지 푹 담그면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묵직한 기분 너무 좋지 않아?
그리고 오랜만에 묵은 때도 밀자. 내가 등 밀어줄게, 알지 등 밀어줄 때 그 시원함.
목욕 마치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겁나 차가운 바나나우유에 빨대 탁! 꽂아서. 알지? 뭔지 알지?
얘를 꼬시기 위해 할 말이 더 많았는데 박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흥~ 좋겠다 하며 방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속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욕 가방에 함께 쓰는 샴푸와 린스와 바디워시를 챙기고, 따로 쓰는 칫솔도 그냥 한 곳에 챙겨 집을 나섰다.
바람이 많이 차지도 않고 딱 좋았다. 벌써부터 목욕을 마친 후 약간 젖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상상되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새벽 1시 즈음의 여탕엔 우리 둘 뿐이었다.
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목욕 짐을 풀고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 비누로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박은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의 할머니 같다고 말했다.
나는 왜 플라스틱 의자와 바가지를 비누로 깨끗이 씻어야 하는지 엄마에게 들었던 말 그대로 박에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맨몸으로 나란히 앉아 각자의 방식대로 몸을 헹구었다.
거울에 비친 나랑 얘의 맨 몸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서 새삼 묘했다.
내가 다른 인간 곁에서 맨몸인 채로 이토록 긴장감 없이 풀어져 있었던 게 언제였더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시간 동안 몸을 헹구고 적당히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갔다.
박과 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아흐~좋오타! 하는 소리가 나왔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을 잠시 동안 말없이 즐기던 중에 온탕 이름이 눈에 꽂혔다.
자수정 열탕, 천연옥 온탕, 비취 이벤트탕.
비취 이벤트탕...?
“박 저것 봐. 좀 굉장하게 야하지 않아? 비취 이벤트탕이래.”
“미친.. 개 야해.”
아무도 없는 빈 목욕탕이었지만 우리는 왠지 소곤거리고 있었다.
박과 나의 목소리가 목욕탕 전체에 크게 울리는 것은 우리가 맨 몸이라는 사실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탕에 앉아 내가 요즘 살짝 좋아하게 된 남자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애 얘기를 하다 보니 억울했다.
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나 통하지 않는 건가.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그리고 박은!
도대체 어째서 좋아하는 마음이 서로 통해 키스하는 사이가 되었는가!
내 얘기를 잠자코 듣던 박은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좋아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빈말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온탕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뜨거운 물이 답답해져서 사우나실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함께 온 어른들의 사우나를 냉탕에서 기다려본 적은 있지만 사우나를 직접 해 본 적은 둘 다 한 번도 없었다.
사우나 실에 들어가는 것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박과 나는 어릴 적 우리를 목욕탕에 데려온 어른들이 했던 것처럼 작은 바가지에 찬물을 받아 사우나 실에 들어갔다.
우리는 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어떤 효과를 기다렸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효과적인 효과 때문에 어른들이 30분도 넘게 사우나를 버티는 것이리라.
우리는 나란히 쪼그려 앉아서 도대체 어른들이 왜 이 덥고 어둡고 목마른 곳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만 5분 내내 했다.
결국 타는 갈증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사우나 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사우나를 즐기는 것은 적어도 10년은 더 나이 먹어야지 가능할 것 같았다.
사우나엔 실패하였지만 마침 때를 밀기에 알맞게 몸이 불어서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때를 밀기 시작했다.
손이 잘 닿지 않는 등은 박이 밀어주었다. 박의 야무진 손끝이 닿는 곳마다 너무 시원하고 좋아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자꾸 튀어나왔다.
박은 때를 밀다 말고 내 등을 탁 치며 제발 입 좀 다물라고 말했다.
"어우, 박, 내 몸을 이렇게 구석구석 만져주는 사람이 진짜 오랜만이라서 그래"
박이 내 때보다 기분이 더 더럽다며 때수건을 손에서 빼려고 하여서 얼른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했다.
박은 확실히 때 미는데 소질이 있었다. 마침 이직하고 싶다던 박의 말이 생각나서 세신사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박은 잘할 수 있겠지만 체력이 안 받쳐줘서 하루에 한 명 밖에 못 밀 것 같다고 대답했다.
확실히 박의 체력은 목욕탕 아주머니들을 모두 만족시키기엔 한참 부족하다.
박에게 등을 맡기고 있자니 어릴 적 엄마랑 목욕탕에 왔던 기억이 났다.
“나는 어릴 때 엄마랑 목욕탕 가면 맨날 울었잖아”
“왜?”
“엄마가 때 미는 게 너무 아파서 엄청 울면서 발버둥 쳤어. 그럼 엄마가 오버하지 말라고 내 등을 물 묻은 손으로 짝짝 때리는 거야. 서러운 눈물을 삼키며 고통 같은 시간을 버텼지 “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오버가 장난 아니구나.”
“아니야, 목욕 끝나고 나면 바디로션 못 발랐어. 너무 따가워서. 진심 피맺혀있었다니까.”
“와 진짜?”
“특히 오금 밀 때가 가장 싫었는데, 엎드려뻗쳐 자세로 있어야 했거든”
“미친”
“엎드려뻗쳐 자세로 있으면 엄마가 본격적으로 오금에 있는 때를 빡빡 밀어,
그러면 막 무릎이 턱턱 접히잖아 그럼 또 궁뎅이를 때려. 다리 딱 펴고 버티라고. 완전 아동학대 아니냐? “
“미친 개웃겨”
한참을 씻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두 시 반이었다.
시계를 보고 놀란 박이 말했다.
“대충 하고 가자”
“대충 하고 가자고 하기엔 한 시간 반이나 있었는데?”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깥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단지형 바나나 우유를 두 개 샀다. 어째서 목욕을 마친 후에 마시는 바나나 우유는 이렇게 꽉 차게 달콤한 걸까.
빨대를 꽂는 박의 손끝이 쪼글쪼글 해져있었다. 나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빨대를 쪽쪽 빨며 말했다.
“아, 너무 좋다. 이 노란 바나나 우유가 쪼글쪼글한 손끝을 탱탱하게 채워주는 기분이야”
“뭐야 너.. 개 오글거려.. 요즘 글 쓴다고 그래? 하지 마”
나는 들켰다 싶어 민망해져서 얼른 덧붙였다.
“아니 기분 개 오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