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도 미련도 없이 사랑만 있었던 어린 날의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생이 왔다.
서울에서 왔다는 혁은 까만 뿔테 안경에 힙합바지를 입고 청색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서울 사람의 서울스러움에 우리 반 애들은 충격을 받았다. 걔가 온 날 이후로 많은 애들이 시내에 가서 청색 빵모자를 사고 엄마가 사 준 은테 안경을 뿔테 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무렵 야인시대는 최고의 드라마였다. 우리는 남녀 할 것 없이 쉬는 시간마다 강성이 부르는 야인시대 음악을 틀어놓고 서로에게 발차기를 하며 놀았다. 당시 반에서 키도 크고 힘도 셌던 나의 별명은 조폭마누라였기 때문에 긴또깡 역할이었던 혁과 나는 숙명적으로 맞짱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자비 없이 퍽퍽 쳐가며 뜨겁게 친해졌다.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된 아주 급작스럽고도 고요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여름, 여느 때처럼 운동장 땡볕 아래에서 혁을 패고 있었는데 내 발길질을 피해 도망가는 걔를 잡으려다 스텝이 꼬여 운동장에 얼굴을 박고 넘어졌다.
쪽팔려서 툭툭 털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눈에 모래가 들어가서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도망가던 걔가 넘어진 날 보고 주춤주춤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하자 걔가 불어줄까?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됐거든? 하고 퉁명스럽게 말한 뒤 눈을 비볐다.
피나는 무릎도 아프고 넘어진 것도 서럽고 모래가 들어간 눈도 아려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걔가 우는 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땡볕을 가려 주었다.
순간 갑자기 우주가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끄럽게 울던 매미들도 일시에 입을 다문 건지 아니면 우주가 다 터져버려서 내 귀가 먹은 건지 사방이 더없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걔가 만들어 준 한 뼘짜리 그늘이 너무 커다랗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걸 감추려고 괜찮아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눈이 아픈척하며 얼굴을 벅벅 비볐다.
손 그늘 사건 이후로 나는 걔를 향해 발차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건 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왠지 부끄러워하며 전보다 훨씬 더 다정스럽게 서로를 대했다.
내가 우유 당번일 때 걔가 나를 대신해서 우유 박스를 들어주고, 걔가 축구하다 넘어지는 날이면 내가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썸이었다.
나는 혁이 좋았고 걔도 나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섣부르게 사귈 수는 없었다.
혁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혁의 여자친구는 6학년에서 제일 무서운 일진 언니였다. 혁과 사귀었다가는 6학년 언니들에게 찍히는 꼴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해서 나는 몸을 사리며 최선을 다해 걔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버디버디를 하고 있는데 혁에게 메시지가 왔다.
<야! 나 그 누나랑 헤어질 거야!ㅡㅡ;; 헤어지면 우리 사귀자 -_-!>
나는 일부러 모른척하며 답장했다.
<-,.- 허걱 몬 소리야. 모야! 혹쉬 너 나 조아하냐 *_*>
<응 ^-^*나 너 조아해>
<그로묜 헤어지고 나서 말해죠 >_<* 사귀쟈!!>
다음 날 점심시간, 사물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걔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혁이 개구진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올 것이 왔구나 싶었지만 괜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 헤어졌다”
그 날이 혁과 나의 1일이었다.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돈 이후 급식실에 가면 6학년 언니들이 살벌한 얼굴로 나를 째려봤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뭘 꼬나보냐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을 만큼 혁이 좋았다.
사귀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만 몰래 좋아했던 우리는 이제는 공식적으로 방과 후에도 어울려 놀며 대놓고 좋아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함께 PC방도 가고,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커플링도 나누어 꼈다.
손 한번 잡지 않는 순진한 연애였지만 매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하게 설렜다. 살면서 다시는 못 겪어볼 투명하고 풍만한 벅참이었다. 그렇게 걔랑 투투를, 그러니까 사귄 지 22일째 되는 날을 막 기념했을 무렵, 4학년에 리나라는 여자애가 혁을 좋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혁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얼마 안 있어 리나는 혁에게 좋아한다며 고백편지를 주었다. 혁은 리나의 고백편지를 받은 후로 자주 4학년 반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 혁이 바람피우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어서 뒤에서만 몰래 가슴앓이를 했다.
며칠 후 혁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사귈 때도 헤어졌다고 말하더니 헤어질 때도 헤어지자고 말하는 걔가 엄청나게 미웠지만 나는 TV에서 본 여주인공이 시련당할 때 그랬던 것처럼 나오려는 모든 말을 속으로 삼키고 최대한 쿨한 척 그러자고 했다.
그날 밤 조금 울면서 편지를 썼다. 리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나는 편지에 혁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빼곡하게 적었다. 일부러 글자 위에 눈물도 몇 방울 떨구었다. 다음날 아침, 4학년 반에 찾아가 눈물 젖은 편지를 리나에게 전해주었다. 약지에 끼고 있던 커플링도 빼서 걔한테 주었다. 리나는 편지와 커플링을 받으면서 언니 죄송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슬픈 표정으로 웃으며 혁을 잘 부탁한다고 예쁘게 사귀라고 말했다. 뒤돌아서서 가다가 우뚝 멈추어서는 둘이 잘 어울린다는 말도 해 주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오글거리고 느끼해서 몸서리가 쳐지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혁은 리나와 일주일도 못 사귀고 헤어졌다. 리나가 너무 어려서 자기와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혁이 말한 이별의 이유였다.
잠깐 동안 어른 놀이에 심취하긴 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열두 살짜리 어린애들이었으므로 야인시대 노래에 맞춰 서로를 패는 사이로 금세 되돌아갔다. 아픔도 미련도 없이 사랑만 있었던 어린 날의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