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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Apr 13. 2019

이불서점

다양하고 평범한 아르바이트들을 하며 20대를 채웠다.

다양하고 평범한 아르바이트들을 하며 20대를 채웠다.

오리온 공장에서 왕꿈틀이 젤리를 한 봉지에 딱 하나씩 담는 일, 하림공장에서 죽은 닭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빼내는 일, 조폭이 운영하는 건전한 낙지볶음 집에서 조폭 단골에게 쫄지 않고 무사히 밥을 나르는 일, 레고 학원에서 미취학 아동들의 온갖 생떼를 견디며 똥구멍에 묻은 똥을 닦아주는 일, 망해버린 수영장에서 카운터를 보면서 월급 받기를 눈치 봤던 일, 얼짱 친구와 함께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기로 하였으나 행인들이 얼짱 친구에게만 전단지를 받아가서 의도치 않게 ‘나만’ 아파트 몇 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내 몫의 전단지를 처리했던 일, 대형마트에서 레자 잡화를 진퉁 가죽이라며 사기 호객을 했던 일 등등등등등...     


알바생 시절의 나는 나의 돈 없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그 생각은 진상 손님을 맞이할 때면 설움과 분노로 급격히 변질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스태프 룸에 들어가 애꿎은 업소용 냉장고를 주먹으로 쳐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궁금했다. 어찌하여 돈 주는 사람은 저리도 뻔뻔하고, 돈을 받는 나는 늘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가. 돈 없는 게 죄도 아닌데 나는 왜 맨날 돈이 없어서 죄송해야 하나. 튼튼한 회색의 냉장고를 주먹으로 치면서 나중에 꼭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눈물을 참으며 다짐했다. 그러나 그때의 다짐과 분노가 무색하게 나는 10년 동안 통장을 불리지 못한 빈털터리 스물아홉으로 성장하였고 여전히 돈만 괜찮게 준다면 아이들의 엉덩이를 꼼꼼하게 닦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맞아서일까 아니면 요즘의 20대들은 다 가난해서인 걸까.

나와 친구들의 대화 주제는 거의 항상 돈이다. 얼마 전에 모인 동네 친구들과도 돈 얘기를 했다.

있는 돈 얘기를 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돈이 없는 애들이기 때문에 주로 없는 돈 얘기를 한다.

돈이 없는 이유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원래는 돈이 많았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쫄딱 망하여 느닷없이 금수저의 도금이 벗겨진 경우, 부모의 부모의 부모부터 가난했으므로 예외 없이 가난을 물려받게 된 경우,

개처럼 일하였으나 선비처럼 버는 경우, 선비처럼 일하고 있으나 개보다 못 버는 경우 등등.    

 

돈이 없는 우리들은 이따금씩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돈’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돈이 생기면 뭐를 할래?라는 질문에 열 아홉은 건물을 사거나, 건물을 살 것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돈이 많아진다면 무엇을 할까 자주 상상한다. 나의 경우는 이렇다.

여차저차 벼락부자가 된다면 일단 건물을 사서 세를 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건물주는 짱이니까. 그다음에 교통이 잘 되어있는 시골구석에 작은 서점을 차릴 것이다.

그냥 서점이 아니고 이불가게를 겸하는 서점. 대략 이불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불서점은 내가 놀라운토요일 작가로 일하면서 시장 답사를 다니다가 생각한 아이템이다.

겨울날 광주의 한 시장에서 온몸을 덜덜 떨면서 시장 길목을 몇 시간째 촬영하고 있었는데,

길목 가까이에 작은 이불 가게가 있었다.

이불가게 주인 할머니는 온돌방에 푹신한 이불을 펴고 한가롭게 누워서 TV를 보고 계셨다.

할머니가 등을 지지는 따끈따끈한 이불속을 상상하며 한참 동안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이불가게에 손님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릿느릿 일어나서는 손님을 맞았다. 손님이 이 이불과 저 이불 사이에서 고민하자 할머니는 이불 두 개를 터프하게 바닥에 펴고서는 손님에게 누워보라고 권하였다.

손님이 약간 망설이다 자리에 누우니 할머니도 그 옆에 함께 누웠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누워 있다가 잠깐 일어나서 다시 눕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신개념 오감만족 와식 판매에 제대로 꽂히고 말았다.

그 충격적인 목격 이후, 나는 이불서점을 자주 구체적으로 고민했다.       


우선 이불서점의 바닥은 절절 끓는 온돌방으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발은 벗고 들어와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과 장인들이 만든 값비싼 이불을 판매할 것이다. 그러려면 책장도 넓고 이불장도 커야겠다. 최고급 이불을 샘플용으로 책장 앞에 여러 장 널어놓아야겠다, 손님들이 마음에 드는 이불을 하나씩 골라잡고 눕거나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물론 나도 폭신한 이불속에 파묻혀 책을 읽는 게으른 주인이 될 것이다.

학업과 없는 돈에 허덕이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도 대, 여섯 명을 고용해서 4대 보험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남부럽지 않은 월급을 챙겨주고 싶다. 걔네가 출근해서 그냥 이불 털고 손님들이 꺼내놓은 책 제자리에 꽂아 넣고 방바닥 온도만 잘 조절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구석에서 밀린 과제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진상 손님이 오면 얄짤 없이 쫓아낼 테다. 내 새끼 같은 알바생 괴롭히지 말고 부끄러운 줄 알라며 삿대질도 몇 번 해야지. 여름에는 수박을, 겨울에는 천혜향을 무한리필 서비스로 쌓아두고 나눠줄 것이다. 과일 국물을 이불이나 책에 흘려도 괜찮다. 그런 것쯤은 웃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아주 많을 테니까.      


아 행복한 상상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던데 누가 만든 대책 없는 달콤한 말일까.

오늘의 이슬이는 자취를 처음 시작할 때 마련한 다 터진 싸구려 이불 위에 누워 트럭에서 파는 한 망에 삼천 원짜리 귤을 까먹는 궁핍한 청춘이지만 혹시 모른다. 주름 좀 자글자글해졌을 땐 내가 차린 아늑한 서점에서 거위털 이불에 누워 손님들에게 최고급 천혜향을 마음껏 제공하고 있을지.

그 날이 진짜 혹시 올까 봐 나는 일단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휴, 다행이다 상상은 무한리필 공짜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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