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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귿 Jul 08. 2024

세상에 작가라니요.

직업란에 써도 될까요. 

 

 저의 명함은 결혼 14년 차 전업주부입니다. 

 소박한 여러 일들과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저의 직업란은 주부입니다.

 제가 하는 생각들과 가치들을 늘어놓으며 그냥 전업주부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흔히들 알고 있듯이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수다를 늘어놓으며 노는 아줌마입니다. 

 틈틈이 구인란을 들여다보거나 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부를 유지하며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찾아봅니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들 못지않습니다. 모르는 세상은 너무 궁금하고 직업은 갖고 싶고, 시간여건은 안되어 축 늘어져 있다가 관심사를 따라가다 보니 수입이 적거나 없는 일들을 꾸준하게 해 왔습니다. 이력서 경력에 늘어놓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간단하게 말하기도 쉽지 않은 소박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온전히 어떤 환경의 조건도 없이 오로지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그 시간들을 즐겁게 보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 한 권으로 멍해질 정도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다 쓸데없는 짓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동안에도 사는 게 꽤 재미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계속 생겨났고, 오래된 삽질의 결과로 뜻밖의 기회들이 속속 찾아왔다. 다시 덮은 구덩이 곳곳에 어떤 씨앗들이 나도 모르게 심어졌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 증명할 길은 없으나 분명 오래전 내가 판 구덩이에서 난 싹임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무루(2020),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어크로스


책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타인에게 얼마나 듣고 싶어 했고, 위로받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무직인 전업주부이지만 명함은 없지만 작은 책 어느 페이지에서 큰 위로를 받고 나만의 삽질을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삽질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무조건 기록해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블로그에 써 나갔습니다. 블로그에 글 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두 달에 한 개 정도도 어렵더군요. 그러다가 브런치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고 글들을 읽어보며 부러워도 해봤지만 감히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글을 잘 쓴다고 인정을 받은 적도 없었고, SNS에 올리는 짧은 이야기들은 정말 친구들한테 하는 아무 얘기였거든요. 

하루는 아이들과 아빠가 놀러 나가고 집은 덥고 아지트 같은 커피숍을 찾아갔습니다. 

 

글은 쓰고 싶었지만 어떤 주제로 어떻게 써 나갈지 개요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이 마음 그대로를 한 번 전달해 보자 하고 작가지원신청을 했습니다. 지금 현재 그대로의 생각들과 글의 깊이도 얕고 길이도 짧은 블로그에 남겨놨던 몇 개의 글을 링크에 첨부했습니다. 

이틀 두 메일 제목에 브런치에서 보낸 것 같은 제목의 메일이 와 있더군요. 광고성 메일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저보고 축하한다고 기대한다고 하네요. 기대라니요. 저에겐 아이들 키우고 가족을 챙기는 쳇바퀴 같은 무사히 넘기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그 일상에 저에게 축하하고 기대한다고 합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잘하거나 못 하거나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기대에 보답해야지 나는 K-아줌마니까.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저는 SNS에 제 사진을 올리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운 게 "글"입니다. 글은 너무나도 나를 드러나게 되어서 혹여서 누가 볼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끄러운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브런치에서 저에게 그 글을 기대한다고 하니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경험이나 일을 시작할 때 습관처럼 관련 책을 찾는 게 일입니다.

이번에도 글쓰기 책을 한 무더기 대여했습니다만 첫 글은 날것 그대로 써 보려고 합니다. 

직업란에 작가라고 쓰지는 못 하고 아직 이 기쁨을 남편 외에 아무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너무 부끄럽거든요.

저의 삽질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닿아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시작점이 브런치인 것을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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