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며 알게 된 것들 01. 나의 출발점
내 그림 중 계속 보고 있게 되는 세 점을 뽑아서 작업 책상 벽에 걸어 두었다. 왜 세 점이냐면, 사실 세 점밖에 없다.
세종 신혼집으로 이사 오며 150L 정도 되는 그림을 버리고 왔다. 어설퍼서 더 정신없었던 첫 이사에서 살아남은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어쩌다 살아남아서 나는 왜 계속 보고 있는 걸까. 다양한 이유가 생각났지만 결론은,
‘보고 있으면 명상하듯 편안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상이 눈길을 끌고,
무엇보다 흰 종이에서 딱 떨어져 나오는 깔끔한 엣지(edge)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또 완전 플랫(flat)한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변덕스러운 내 기질에도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미묘하게 섞은 색들의 붓질 자국이 또다시 한참을 바라보게 한다.
그림자도 없이 덩그러니 그려진 큰 그림은 낱말 카드를 보는 것 같아서 애기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위로가 된다. 보드게임도 한 판하고 싶어지고..
어쨌든 결론은 '기부니 조크든요'다.
내가 흠모하는 것.
내가 편안해하는 것.
내 몸이 할 수 있는 것.
이 3가지가 모두 다를 수 있음을 그림 그리며 알게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곤 실레, 앙리 마티스, 데이비드 호크니
나 역시 누가 들어도 인정하는 거장들의 그림을 흠모한다.
추앙하다 못해 훔쳐 올 수 있다면 훔쳐 오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이 할 수 없다…
앞으로 100년 동안 그림에 매진한다면야 만 130살 생일쯤에는 그들처럼 그려낼 수 있겠지만. 그 100년은 내가 편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짧은 시간 그림을 그리며 배운 것은
'내 몸이 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은 편안하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장 편안한 그림은 딱 저만큼이다.
지금 나의 현 상황이고, 내가 출발할 수 있는 감사한 시작점이다.
저 그림 세 점은 아마
앞으로 내 그림의 원뿌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기서 시작해서 뻗어나가다 길을 헤매게 된다면
다시 잊지 않고 찾아올 고향집이다.
나를 잘 알고,
그 장점을 특출나게 발현하는 작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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