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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되는 건 없다, 영원한 어려움은 없다

by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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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사과를 먹으면서도 사과 한 개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시큰둥하게 흘려 들었어요. 사과, 배, 감, 오이, 대추. 흔하디 흔한 과일과 채소를 사고, 씻고, 먹고, 먹이면서도 그것들을 자라게 한 해와 달과 바람, 비,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의 손길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언제나 당연히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것 인 줄만 알았어요. 시원한 마트의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깨끗하게 포장이 된 채로 말이지요.


손만 뻗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잊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되짚어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화장실에 가고, 음식을 먹고, 일을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천둥과 번개를 몰랐던 지난날. 그 모든 일이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필요했던 지극한 정성과 눈물, 고통을 마주하지 못했던 시간들을요.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은 대추 한 알. 이 작은 한 알이 둥글게 붉어지는 데에도 그토록 긴긴밤과 낮이 필요한 데, 걷고 뛰고 말하고 생각하는 인간이야 말해 무엇할까요? 수박 반 쪽보다도 가벼운 무게로 태어나 버둥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작은 아이가 저 혼자 먹고, 자고, 싸는 그 날이 오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낮과 밤, 태풍과 벼락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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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 순간은 영원이에요. 머리 꼭대기부터 발 끝까지 머리카락 하나, 잔털 하나 빠짐없이 흠뻑 젖었는데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피할 곳은 없고… 패일 듯이 내리 꽂히는 빗줄기가 체온도 앗아가고 이성과 희망도 지워버리겠지만 잊지 마세요. 폭풍우는 반드시 지나가고, 물웅덩이로 질척한 자리에는 작렬하는 태양이 찾아옵니다.


잠을 잘 수 없어 정신 나간 괴물처럼 포효하던 저는 지구의 순환과 생명의 진리를 거부했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 어둠이 가고 빛이 오듯 지금의 고통도 추억의 한 자락이 되는 날이 올 거란 걸 믿을 수 없어 포기하고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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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꾸역꾸역 버텨낸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며 올라섰어요. 그리고 맞이했습니다. 8시에 잠든 아이가 다음날 8시가 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자는 날, 너무 졸리고 피곤하다며 저 혼자 침실로 걸어 들어가 잠이 드는 날, 엄마가 없는 캠프장에서 친구와 손을 잡고 잠이 드는 그런 날을요.


기적 같은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15개월의 어느 날, 잠에서 깬 아이를 여느 날처럼 아기띠로 안아 재우는 데 마구 몸을 비틀어대며 내려달라고 요구를 하더라고요. 버둥거리는 아이를 바닥에 눕혀주니 이불 위를 뒹굴 뒹굴. 한참을 뒤척이고 움직이다가는 스르르 잠이 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그 날 후로 일주일에 반은 안겨서, 반은 누워서 잠이 들었고, 한 달 뒤부터는 안아달라는 요구 없이 바닥에서만 자기 시작해 자다 일어나 아이를 안고 서성이는 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어요. 시간마다 깨서 우는 잠투정은 24개월까지 지속됐지만, 비몽사몽간에 토닥여주기만 하면 되니 어려울 것이 없는 시간이었고, 세 돌을 기점으로는 8시간, 10시간씩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는 날들이 평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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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잠이 들면 몇 시간이고 미동도 없는 아기 때문에 손가락을 콧구멍으로 가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하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단 한 시간을 푹 자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아기도 있어요. 졸리면 저 혼자 스르르 잠이 들어 걱정이 없다 했더니 밥 한 술 먹일 때마다 천불이 나는 집도, 무슨 수를 써도 해결되지 않는 변비 때문에 매일 항문 마사지를 해주며 이제나 저제나 똥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엄마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 힘이 들어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이 고통이 영원할 것만 같아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그냥 주저앉아 사라지고만 싶을 때. 그럴 때,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투박하고 거친 손에 쥐어진 새빨간 대추 한 알을 떠올리세요. 작디작은 대추 한 알, 흔하고 평범한 대추 한 알도 저 혼자 저절로 붉어지고 둥글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대추나무에 쏟아졌던 벼락과 천둥, 무서리 모두 잠시 잠깐 머물다 사라진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림책 활용 TIP


<대추 한 알>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전문을 그림과 함께 담은 시 그림책이에요. 시인은 작은 대추 알 속에 담긴 시간을 포착해 8행의 짧은 시로 간결하게 조각하고, 그림 작가는 시인이 감추어 둔 행간의 이야기를 시각화하여 묵직하게 펼쳐놓습니다.


시인과 그림 작가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 언어와 회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세요. 특히 돌 전후 아이에게 강력하게 추천을 하는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유아에게 이보다 좋은 언어교재는 없기 때문이에요.


저는 문학동네에서 나온 아기시 그림책 세트를 9개월경 구입해 읽어주었는데,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관심도 주지 않았던 책 읽기에 푹 빠진 계기가 되었어요. 동요로 만들어진 시가 많아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어찌나 눈을 반짝이며 집중을 하던지요! 몇 번 불러준 다음부터는 제가 먼저 책을 찾아와 읽어달라 조르기 시작해 두 돌까지 마르고 닳도록 읽었답니다.


시는 운율이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기가 참 좋아요. 곱고 예쁜 시어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울려 퍼지는 아름다움, 일상의 말하기와 언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청아함을 아이와 함께 느껴 보세요.



나를 위한 태교의 시간
1.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는 가치는?


언제나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소중함이 너무 많아요. 너무 당연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 했던 것들을 찾아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눈부신 가치를 발견해봐요.




2.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그 순간에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던 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고 사그라지지요. 잊을 수 없는 고통, 힘들었던 경험을 되짚어 보세요. 그때의 나는 어떠했나요? 한 달 뒤, 1년 후, 지금의 나에게 그 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당시의 괴로움을 어떻게 덜어냈는지 들여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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