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한 잔 (2) 엄마 자격도 없는 뚱뚱한 몸뚱이가 꼴 보기 싫을 때
엄마를 위한 마법 카페, 깨달음 한 잔.
엄마 자격도 없는 뚱뚱한 내 몸뚱이가 꼴 보기 싫을 때
(2)
(1) 편에서 이어집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히는 이유
나를 파괴하고 망가트리는 수치심. 이 수치심은 대체 왜 생겨나는 걸까요?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하며 수치심을 연구한 저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수많은 원인들의 공통점을 제시하는데, 그건 바로 ‘사회와 집단의 기대’예요.
인터뷰 답변서들을 읽고 수백 명의 경험담을 읽다 보니, 그들 모두가 경험한 수치심에 ‘공통분모’가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이들 대부분은 '거미줄처럼 겹겹이 얽힌 서로 모순되고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여러 사회와 집단의 기대들'로 인해 수치심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와 집단의 기대들이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가 되어야 한다 (who should be).
나는 ~를 해야 한다 (what should be).
나는 ~게 해야 한다 (how should be).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하는 'should be'가 얼마나 많은가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를 시작으로, ‘자연 분만을 해야 한다’,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 ‘세 돌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 ‘일관된 양육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넘쳐나는 육아 지침들... 이뿐인가요? 출산 후에도 변함없이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연예인들을 필두로 몸매와 외모에 대한 ‘해야 한다’ 또한 쉴새 없이 날아드니 우리는 수치심의 거미줄에 뒤엉켜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를 수치심에 빠트리는 거미줄은 너무도 많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기대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가 없어요. 날씬해야 하지만 몸무게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자기 관리를 완벽하게 해야 하지만 가족과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고, 아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어야 하지만 나의 일과 경력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니!
무엇을 선택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기대가 존재하는 차악과 최악의 선택 속에서 저는 끊임없이 수치심을 느끼고 나를 비난했으며, 나 자신을 혐오했어요. 엄마 자격도 없는 뚱뚱한 내 몸뚱이가 꼴 보기 싫었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며,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수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법
[수치심→비난→자기혐오→수치심]을 끝없이 반복하며 처절하게 망가져가던 시간들. 하지만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책에서 찾았으니, ‘수치심 회복탄력성 기르기’예요.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의 저자는 수치심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질 방법은 없으나 수치심을 느낄 때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술을 기를 수는 있다고 말하며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수치심 회복 탄력성을 기르는 방법 하나 : 수치심 촉매제 알아차리기
수치심을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수치심 촉매제 알아차리기'입니다. 무엇이 나에게 완벽주의를 강요하며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지, 나만의 수치심 촉매제를 찾아 이해하라는 거예요. 저자는 일과 육아를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 워킹맘으로 보이고 싶었던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촉매제도 찾을 수 있었어요.
'나는 엄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촉매제는 바로 '우리 엄마'였어요. 친정엄마는 전업 주부로 언제나 완벽하게 우리 식구를 챙기셨어요. 늘 반짝이는 깨끗한 집, 뽀송뽀송한 이부자리. 피자, 치킨, 탕수육, 햄버거, 핫도그, 빵 무엇 하나 빠지는 메뉴가 없는 풍성한 엄마표 간식과 화려한 밥상. 엄마는 무한한 이해심과 배려심, 포용력과 인내심으로 지독하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저를 감싸 주셨고, 저는 늘 넘치는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은 우리 엄마가 전부였고,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기준은 우리 엄마 단 하나였어요. 나는 엄마 딸이니까, 그런 사랑을 받았으니까, 나도 당연히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어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나는 결코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매 순간 처절하게 확인하며 증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나의 수치심 촉매제
잠투정이 심한 아이 때문에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렸던 저는 엄마에게 자주 넋두리를 늘어놓았어요. 그럼 이런 답이 돌아왔지요. "난 널 업고 밤새도록 동네를 걸어 다녀도 힘들다는 생각 안 하고 키웠는데? 마냥 예뻐서 말이야." 그땐 몰랐어요. 엄마의 이런 말들이 나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촉매제였다는 것을요.
전 늘 생각했어요. '왜 나는 예쁘다 보다 힘들다를 강하게 느끼지? 왜 나는 엄마 같은 사랑을 주지 못하지? 왜 나는 받은 것을 전해주지 못하지?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지?' 이 모든 '왜'의 결론은 늘 하나로 모아졌어요.
'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 그렇구나. 나는 엄마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구나. 자격 미달자구나. 내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을까?' 수치심. 저를 지배한 건 수치심이었던 거예요. 수치심 거미줄에 갇혀 그 외의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수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 : 해야 한다 버리기
나를 수치심으로 몰아넣는 촉매제를 깨닫고 난 뒤, 저는 더 이상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기 시작했어요.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해야 한다’를 버리는 것! 이것만으로도 수치심의 굴레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유수유를 못 하면 어때요, 돌도 안 된 아이를 두고 복직을 하면 어때요,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지 못하면 어때요, 집이 좀 더러우면 어때요, 언제나 일관된 양육 태도를 고수하지 못하면 어때요. 좋은 엄마, 훌륭한 엄마가 안 되면 어때요? 꼭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나요?
이렇게 하면 좋은 엄마이고, 저렇게 하면 훌륭한 엄마라는 틀은 누가 정해 놓은 걸까요? 지금 내가 쫓고 있는 ‘좋은 엄마’라는 목표는 어디서 생겨난 건가요? 내가 내 안에서 만들어 낸 모습일까요?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억압과 기대는 아닐까요?
‘좋은 엄마’라고 인정받지 않아도,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아도, 수많은 ‘해야 한다’를 하지 못 해도, 한 아이의 엄마로 그저 열심히 하루를 보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지독한 수치심에 사로 잡혀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쉽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깨달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감사했어요. 그리고 내 목을 조르고 있는 ‘해야 한다’를 찾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