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한 꿈 하늘에서 다 이뤄 오빠
며칠 전 나와 잘 알고 지낸 오빠가 하늘나라에 갔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날은 비가 억수로 많이 내렸다.
대구로 향하는 길은 착잡하고도 먹먹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에 만난 인연은 소중하기 때문에 '있을때 잘 하라고'.
난 다른 각도의 견해를 갖고 있다.
전 세계 인구가 합의하지 않아도 공통으로 아는 사실 하나가 있다.
인간은 다 결국 죽는 것이다.
죽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갓난아이의 '죽음'의 의미는 부모의 가르침과 성장된 뇌로 인해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누구도 매일 매시간 매초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행동으로 일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장례 문화는 이렇다.
경건한 마음으로 가족들께 절을 하고, 슬픔을 잠깐 함께 한다.
그 후에는 바로 식사를 권한다.
착잡한 마음으로 수육과 육개장을 뜬다.
시간이 지난 후 아는 지인들이 오기 시작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순서는 전혀 다를게 없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그저 묵묵히 밥만 뜨는 사람이 있다.
장례식에 오면 오랜만에 아는 지인들을 만난다.
분명 나는 슬픔을 품은 채 죽음을 믿지 않을 정도의 심경인데, 점점 미소를 띠면서 웃고 있다.
죽음의 인식이 멀어져서일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의 근황이야기로 나의 마음은 경쾌해진 걸까?
이렇다.
세상은 이렇게 불규칙한 조화로 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없고,
내가 없어져도 노을은 지고, 해는 뜬다.
하지만, 먼지처럼 흩날리는 존재인 나는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다.
'너와 나'는 생물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 삶과 투쟁하며 인간답게 살다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