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앎음앓이란
주변에서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사람이 많이 알아도 피곤한 법이야."
"때론 모르는 게 약이야."
어느 모임에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싶고 그렇게 되어 간다."라고,
근데 어느 분이 답변을 하셨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힘들어.. 피곤해"
골똘히 생각해 봤다.
과연 안다는 게 나를 피곤하게 한다면 앎이란 무엇일까.
앎은 나에게 어떤 존재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지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왜 호모사피엔스는 알려고 하는 기피성을 보일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은 협력과 투쟁을 연속해왔다.
호모사피엔스의 뇌가 네안데르탈인보다 월등히 작은 이유가 뭘까.
앎은 곧 나의 삶과 적용시켜 쓰일 수 있는 정반합이 한계를 구분 짓게 했을까.
농부는 농사만 지을 수 있는 뇌가 특화되어 있고,
강사는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뇌로 특화되어 있고,
과학자는 과학만 할 수 있는 뇌로 특화되어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는 내 특정한 분야로 에너지를 쏟는 인간의 종은 앎의 한계를 정해놓고 살고 있다.
이렇게만 봐도 인간은 무지하고 알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은 자연스럽기 힘들다.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뇌를 자극해야 하고, 인위적으로 해야 하는 노동의 에너지가 크다.
여기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이렇다고 본다.
동물은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되, 내가 왜 본능을 따르고 있는지 한 번 더 멈춰 설 수 있고,
지적인 생각을 해서 부푼 꿈을 꿀 수 있다.
꿈을 꿀 수 있는 권리, 행복할 수 있는 권리, 홀로 위대해질 수 있는 용기
이 지적인 훈련은 인간의 권리로 부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