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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lsim Dec 20. 2021

불확실하다는 공포

2021년 사건들과 넋두리


새벽 3시 46분.

잠이 오지 않는다. 습관처럼 열을 재본다. 37.3도

하루 중에 가장 온도가 낮은 시간. 


다행히 나의 자율신경계는 고장 나지 않아서 체온이 가장 낮은 시간대에는 미열을 유지하고 체온이 가장 높은 낮과 오후 시간대에는 38도를 넘어선다.





병가


3달이 넘도록 열이 지속되더니, 결국 내 몸은 버텨내지 못하고 발열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에게 몸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함락된 부분들에는 각종 통증과 증상이 생겼고 나는 후두신경통, 람제이 헌트 증후군, 전정신경염, 하지 저림, 요추 통증 등의 다양한 병명을 얻게 되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심하다는 신경통을 견디기 어려워 뒤통수에 신경차단술 주사를 놓아 신경을 잠재웠다.

증상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입원을 했다. 아주 많은 검사를 받은 후 몇 가지 고장 난 곳을 추가로 더 찾아냈지만 끝내 불명열이 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찾지 못했다. 


다양한 증상이 더해져도 열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여전히 낮시간에는 38도를 넘는 열이 유지되고 있다. 내 몸은 계속 무언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리고 추가된 어지럼증과 전신피로감 하지 저림으로 인해 나는 병가를 내고 쉬게 되었다.




슈퍼노말 환자


입원하는 동안 중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입원했던 곳은 암신경센터였기 때문에 주로 암환자들과 뇌수술을 한 분들이었는데 머리를 밀지 않았고 어지럼증에 비틀거려도 휠체어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나는, 

그곳에서 환자라기보다는 슈퍼노말 젊은이였다.


하지만,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하지 신경 경련과 후두 신경통 그리고 열을 내는 몸은 나에게 통증과 고통을 주었다. 왼쪽 전정신경이 전혀 활동하지 않는 상태인 나는 어느 날에는 이 세상 전체가 큰 유람선처럼 흔들리고 어떤 날에는 내 몸이 큰 원을 그리듯이 회전되는 느낌을 받으며 걸을 때에는 한쪽 방향으로 몸이 계속 치우쳐졌다. 그렇게 나는 나름의 고통 속에 머물고 있는 환자였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아주 많은 검사들을 받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제발 이 검사 후에는 불명열의 원인이 나오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의사 회진 시간에 맞추어 매일매일 나의 증상을 기록하고 공유했다.



하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고 퇴원 수속을 밟는 날 나는 잠시 무너졌다. 중환자가 아님에도, 머리카락이 온전한 슈퍼노말의 젊은이는 환자복을 입은 채 눈물을 옴팡 쏟아냈다.


무너져 내린 환자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진 담당의는 

결국 원인 모를 자가면역질환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남겨주었다.




불확실한 시대의 제물


원인을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에 대한 공포는 원시 시대부터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원인을 모르던 시절, 사람들은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날이 되면 신이 화가 났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모두 함께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불어대는 바닷가에 모여서 둥근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불확실하고 무시무시한 순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이겨내려고 애썼다.


중세시대에는 불확실하고 원인 모를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마귀에 씌었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 이상한 행동을 보여서 마녀사냥을 당한 여성들은 아마도, 대부분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 질환을 가진 내면의 상처가 많아 심리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고 각종 첨단 기술이 넘쳐흐르는 현대 시대다.

우리는 옷을 입고 팔에는 스마트 위치를 차고 모두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온라인 세상에서 소통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확실하고 원인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원시적으로 반응한다.


코로나가 그렇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경증으로 지나가는 건지, 그리고 왜 이렇게 변이가 쉽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태에 우리를 머물게 한다. 나아가 이 비극적인 현실이 언제 끝이 나는지 조차 불확실하다. 정말이지 엄청난 공포다.


여전히 불확실한 것에 대한 공포를 다루어내는 능력은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우리 현대인들은 코로나라는 불확실한 바이러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무섭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미와 이유를 부여하고 공공의 적을 만들어 그들이 이 사태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비난한다. 


코로나가 시작된 초기에는, 확진자가 신에게 바쳐지던 산 제물이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들은 모든 동선이 오픈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행위들로 인해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이유가 붙여지고 그로 인해 죄인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2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지금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더 커졌다. 게다가 많은 자영업자와 의료진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과다한 업무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제는, 백신 비접종자가 죄인이다.


어떤 이유로 그들이 백신을 맞지 않고 있는지, 혹은 못 맞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이해해주는 것은 이제 사치가 되었다. 신에게 바쳐지는 산 제물은 이제 백신 비접종자들이다.




확실해지기 위한 노력


나는 알다시피, 원인 불명의 각종 증상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다면 나는 그에 더해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공포까지 느끼고 있다.


불확실함에 대한 공포에 완전히 질려버린 나는, 이 순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끝없이 내 몸의 증상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찾아내고 어떠한 단어로 확정하고 싶어 애를 쓴다.


내가 최근에 가공식품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걸까?

혹은 내가 위스키를 즐겨 마셨기 때문일까?

내가 소리, 촉각, 시각에 예민한 사람이어서 이런 병들이 생긴 걸까?

여러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즐기는 작업 패턴이 문제였던 걸까?



다양한 원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계속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 마치 이런 몸의 증상으로 고통을 겪어도 싼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답을 찾아내려 한다. 그렇게 얻어진 답들은 최소한 나를 불확실한 상태에 머물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암환자가 암에 걸려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걸린 것이 아니고.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듯,


내 몸의 증상 역시 내가 어떤 이유라고 딱 꼬집기에는, 다양한 확률로 일어난 여러 가지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에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확실하다는 공포에 머무는 것


결국 나는 불확실한 상태에 가만히. 머물게 되었다. 불확실함의 공포를 온전히 마주하며 나 자신에게 충분히 아파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기 위해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찾아 헤매며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불확실함의 공포 속에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먹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결국 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불확실한 공포를 주는 바이러스에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공의 적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선택은 타인에게 맡겨두고, 각자의 자리에서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거나 걸려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 쉽지, 불확실함의 공포를 느끼는 상태에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인류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 이제, 선택을 할 차례이다.


나 스스로를 아픔을 느끼기 마땅한 죄인으로 만들고 그렇게 완성된 가상의 확실함 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불확실한 이 상태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는 내 마음을 다독이면서 좀 더 나은 몸 상태가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며 미래를 바라볼 것인지.


불확실함의 공포에 가만히 머물기 위해서는, 

믿음과 희망이 필요하다.


나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가상의 확실함 속에 머무는 것보다는, 불확실함의 공포로 비록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는 것이 결국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일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내 몸이 아프게 된 이유 같은 과거가 아니라,

내 몸을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믿음과 희망을 품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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