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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Jun 25. 2024

그 시절의 빌런들.

패스트푸드 상가 화장실의 바바리 맨, 터질듯한 교복 치마의 깻잎 머리 일진, 직접적인 폭력은 없더라도(있었을 수도) 밥상 한두 번씩은 엎었던 아빠들, 성추행의 경계를 넘나들던 학교 체육 선생님.


과연 그 시절의 빌런은 누구일까. 이들은 그때 그 시절을 넘기고 다정한 삶에 정착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부지런할 수 없었던 바바리 계의 새벽반. 아침 일찍 등교하는 여중생들을 놀랠 킬 생각으로 밤잠을 설친 건지, 전봇대와 빌라 골목 사이에 자리 잡고 참 부지런히 아침 손목 운동을 하셨다. 처음에나 놀라지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그들의 일과를 상상하며 '이쯤에서 튀어나오려나' 예상 한다. 아무리 봐도 익숙지 않지만, 이젠 소리 죽여 욕을 삼키는 예상치 못한 실력이 탑재되기도. 

역시, 무슨 일이든 짬바는 무시하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따라 참 많이도 다녔다. 나름 모범생 기질이 다분했던 난 노래방도, 음악 방송도, pc방도 지금의 절친들과 함께 첫 경험을 했는데 지금 보니 이들은 나를 속세에 먼저 찌 들여 세상의 그 어떤 반격에도 굴하지 않는 대범함을 장착 시켜준 장본인들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시장 속 노래방. 새마을의 금고 역할을 하는 은행 옆에 있던 그 노래방에서 추억을 부르는 사이, 반갑지 않은 일진들이 기습하여 마이크를 뺏어갔다. 불의를 보면 한 눈깔 했던 나는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고, 그와 동시에 말이 먼전지, 손이 먼전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가격을 당했다. 일요일의 나태하게 늘어지는 한 낮에 두 뺨이 발갛게, 아니 시뻘겋게 부어올라 귀가한 딸을 본 부모님은 다음날 당장 학교를 박차고 들어갔다. 상담실에서 펼쳐진 앨범 속, 그 아이들 얼굴이 기억나냐며 찍어보라던 선생님의 말씀에 어찌 바로 찍을 수 있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방어 속에 몇몇 얼굴을 간신히 짚었고, 바로 교실의 스피커에서 그 아이들 이름이 불리기 시작했다. 


각종 성씨의 향연을 뒤로 하고 내 친구들 이름이 불렸다. 그녀들은 그날의 상황을 대조하기 위한 진술서를 써야 했으며 그렇게 생애 첫 학교폭력은 막을 내렸다. 아니, 길거리에서 문득문득 마주치는 그 애들은 시간이 지나 멀쩡한 차림새로 신분 세탁을 했고, 나 혼자만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수십번의 뺨을 되풀이해서 맞았다. 도돌이표 같은 기억은 마흔을 앞둔 지금도 뾰족하리만치 선명하며 그들의 마흔을 상상한다. 네 자식들이 더 궁금하단 표현이 맞으려나. 그래서 너희 자식은 학교에서 안녕하고? 엄마 같은 괴물에게 엄마의 짓거리를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진 않은지 몹시도 궁금하네. 그리고 네 반응도.

© unsplash

첫 pc방을 경험했던 날,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참 예쁘게도 포장된 그 채팅 사이트에서 '원조교제'라는 닉네임이 말을 걸어 왔었다. 흡사 떡볶이의 원조, 원조 족발, 원조 욕쟁이 할머니처럼 교제 계의 원조려나 하는 생각으로 몇 마디 나누다 이상한 느낌에 차단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속세에 찌들지 않은 순수함이 이렇게나 무섭다. 그 시절, 세상의 무서움을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겁대가리 없었다. 우리의 일탈이 청춘의 한 챕터이자 사춘기의 보증수표인 양 친구 집에 모여 백 스트릿 보이즈의 테이프와 브로마이드로 우리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끔 학교 남자 친구들 이름을 입에 올리긴 했지만, 또래 이성 친구보단 몇 살 많은 선배와 바다 건너 노란 머리의 카터에게 빠져 살았던 날들이 컸다. 


집에 오면 58년대생 빌런이 있었다. 집에선 별다른 말조차 하지 않는, 그저 답답할 때는 눈으로 레이저 쏘던 이 시대의 가장들. 기름먹인 노란 봉투에 두둑한 월급을 전달하며, '내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배짱을 얻은 그들. 그가 하얀 러닝과 트렁크 팬티로 집 안을 활보하며 담배를 뻑뻑 피고 있을 때 그의 옆에는 전업주부 와이프와 옆으로 치켜뜬 두 눈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빌라에 살았는데, 옥상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 때문에 더 열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아랫집, 옆집, 지하까지 각 세대 숟가락은 물론 가끔 드나드는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대문을 열고 살았고, 그에 못지않게 마음은 더 퍼주며 살았다. 각자 집에서 정 붙일 곳 없던 아줌마들은 모여 커피믹스 한잔하고, 열무국수를 참 맛있게도 비벼 먹었다. 때론 인형 눈 붙이기, 봉투 붙이기 같은 부업을 하며 남편 욕을 하느라 손보다 입이 더 바쁜 시대를 살았던 건 덤이고. 그렇게라도 속풀이 하지 않았으면 그녀들이 전기밥솥을 지킬 수 있었을까. 포대기 팽개치고 춤바람 나지 않은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니, 그 시절의 빌런은 서로가 아니었나 싶다. 

© unsplash

빌런들의 기 싸움 덕에 더 강한 내성을 가진 아이들이 탄생했다. 세상의 포악한 이기심과 수치심 덕에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무덤덤할 수 있고, 때론 감춰야만 하는 세상에 내던져졌는지도 모르겠다. 손톱 끝이 새까매지도록, 균에 일가견 있도록 놀았던 우리들은 웬만한 질병은 거뜬히 이겨내며, 짓밟는 발길질에도 고개들 악다구니를 장착했달까. 세상의 빌런들이 없었다면 더 고고한 생명이 탄생했겠지만, 과도기를 거쳐오며 단단해진 우리는 이제 세상의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단도리하며 용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의식과 무의식을 채찍질하며 그렇게, 신분 세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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