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lazy하게 늘어지는(여기선 게으르다는 한글 느낌으로 다 담기지 않는, 흐물거리며 흘러내리다 정체한 듯한) 공기가 주는 묘한 따스함이 있다. 나른함이 식도를 통과해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마치 한 여름의 피에스타 같은 느낌이랄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난 뒤의 적막함. 적당하게 식은 2년 차의 연애.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감정과 오밀조밀 간지럽히는 새초롬함이 아닌 미지근한 바람이 전하는 날씨의 숨결.
풀 깎는 냄새, 짧아진 옷차림, 열리는 땀 세포, 살짝 상기된 두 뺨의 홍조와 더불어 치열한 여름을 채우는 단어와 장면은 뭐가 있을지, 나만의 여름 낱말 팔레트를 채워본다.
6월.
덥긴 하지만 아직 에어컨 없이 버틸 만 하니 누렇게 색이 바랜 선풍기를 틀고 덜덜거리는 바람을 맞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어느새 추워 바람 세기를 약풍으로 조절하는데 이땐, 꼭 발을 저만치 뻗어 발가락으로 눌러야 제 맛이다. 그러다 두 개의 버튼이 눌린 바람에 다시 허리를 숙여 손가락으로 누르겠지. 그래, 여름은 두 번 수고의 맛이다.
직접 키운 오이로 만든 얼음 동동 오이지, 오이 상치, 오이지무침과 오이소박이.
이것도 오이, 저것도 오이. 밥상에 올라온 오이 개수를 세다 그만 헛웃음이 나오는. 그래, 여름은 오이지.
빨간 방울토마토를 비싼 값에 주고 사 먹다가 여름이 왔다. 밭에서 키운 토마토를 이웃에 나눠주고도 커가는 기세를 따라잡을 수 없다. 혀를 내두르던 입은 금방 마리네이드와 주스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다.
마리네이드를 하겠다며 양념통을 살펴보니 바질이 없고 샐러드용 올리브유가 없다. 필요한 재료를 계산하며 갸우뚱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칼집을 넣고 뜨거운 물에 데쳐 하나하나 껍질을 까다 보니 손이 벌건 토마토다. 양념을 골고루 버무려 냉장고에 넣고 마지막 말을 당부한다. 반드시 맛있어야만 한다!
여름의 실함이 곳곳에 터져있는 방울토마토를 믹서기에 한 움큼 집어넣고 꿀을 쪼르륵 넣는다. 숟가락에 묻은 꿀을 검지손가락으로 쓱 닦아 입으로 쪽 빨아먹는다. 덜덜거리는 믹서기가 터질라 뚜껑을 부여잡고 오래 돌려주면 친정 표 토마토주스가 완성이다. 방울토마토로 만들어서 껍질이 다소 씹히는 거친 맛이지만 이내 꿀떡꿀떡 삼키며 드는 생각. 방울토마토로 주스라니. 그래, 여름은 사치의 계절이다.
7월
뜨거운 햇살과 건조한 바람 속에서 자연 샤워 중인 빨래의 살랑거림을 보며 생각한다. 습하지만 않다면 이 계절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눅눅한 장마 속 건조기를 사고 싶다가도 이 '여름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다음 해에 고민하지 뭐'하며 올해도 건너뛰어 버린다. 바람이 속속 말려주고 햇살이 소독해주며 향긋한 세제 향을 날려 보내면 '이제 여름이구나' 생각에 절로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다. 나도 빨랫줄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바람 그네를 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 여름은 빨래 놀이터였다.
열무와 오이지 속 풋고추와 빨간 고추장이 올라왔다. 손끝으로 눌러가며 맵기를 가늠한 뒤 여름을 베어 물었다. 아삭하게 씹히며 끝맛에 살짝 맵기가 올랐을 때, 찬물에만 흰 밥을 꿀떡 넘겨주면 아주 그만이다. 밥알을 몇 번 씹지도 않고 후루룩 삼키며 느낀다. 아, 이게 여름이지. 그래 여름은 살짝 약은 맛이었다.
8월
한여름의 찌는듯한 더위가 무서워 이번 해의 예상 덥기를 뉴스에 검색해 보지만 여전히 최고로 더운 해가 될 것이 뻔하다. 얼마나 더우려나.... 던 생각은 곧이어 찰옥수수를 떠올린다. 여름 감자로 만든 감자샐러드를 분에 넘치게 넣은 샌드위치를 생각하니 이내 여름 속으로 성큼 뛰어들고 싶다. 여름은 이랬다. 숨이 턱 막혀 쓰러질라치면 냉수 한 모금의 간절함과 옥수수의 찰기로 이내 속을 달래주는. 이 맛에 여름 하지 싶게 나를 안달복달하게 만드는. 그래, 여름은 밀당의 계절이었지.
시원한 유리병에 냉수를 졸졸 가득 채우고 마른 작두콩을 넣고 맛있게 우러나오길 바라며 냉장고에 넣는다.
어차피 냉장고에 들어가 한밤을 지새우기에 냉수를 넣지 않아도 되지만, 냉수를 냉장고에 넣으면 더 차가워 질 것만 같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의 노력이자 바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병 역시 꼭 유리병이야 하는데 내일 아침 꺼냈을 때 온도 차로 인해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이 여름의 갈증을 더 시원히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사실, 여름은 눈으로 느끼는 것 아닐까. 새빨갛게 익은 수박 속을 보면서, 찰옥수수 알갱이들의 오동통한 찰기를 보면서, 수미감자의 얇은 껍질을 보면서, 뭉게구름 넘실거리는 하늘색을 보면서, 붉어진 뺨 속 흐르는 땀방울을 보면서 '아, 이제 여름 한 가운데 있구나' 실감하는 것. 어쩌면 그래서 장면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진정 여름인 것 같아서. 이 한 계절을 잘 살아내고 있구나, 느낄 수 있어서.
이글거리는 햇살에 기권하고 싶은 나날이 연속이지만 순간을 열심히 눈에 담는다. 어쩌면 삶은 그런 것 이겠다. 펼쳐진 세상 속, 관심을 끄는 장면을 눈에 담고 내 취향을 확인하는 것.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각자의 초점이 다르기에 나만의 기준과 기분으로 시절의 계절을 차곡차곡 담아 간다. 그렇게 쌓인 24년의 여름을 눈에 담고 종이에 적어 다시 꺼내보며 추억하는 것. 그것이 계절을 사랑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래서 오늘도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계절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