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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Sep 02. 2024

빨간 감자채 볶음

행복은 밍밍하고 밋밋하고 맹숭한 것.


쌍꺼풀 없는 눈, 낮은 코, 평평한 옆얼굴. 윤기 없는 검은 머리카락, 짤막하고 뚱뚱한 다리, 살짝 튀어나온 옆구리 살. 보란 듯이 애써 치장한 모습이 아닌 타고난 것. 빼입은 옷에 어렵게 끼워 맞춘 모습 대신 훌러덩 쉬어지는 숨 같은 것. 행복은 그런 것.


학창 시절, 보온 도시락을 떠올릴 때마다 신김치 지짐과 감자채볶음이 생각난다. 작은 원형 통 속 반반씩 나뉜 칸에 소복이 담은 탓인지, 뚜껑을 열었을 땐 항상 빨간 물이 든 감자채를 마주해야 했다.

"아, 엄마 또!"

다른 친구들의 잘 보존된 반찬에 순차적으로 시선을 옮기다 내 반찬통을 마주할 때면 미간이 구겨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몇 번째야. 왜 매번 섞인 반찬인 건데. 엄마는 그것도 제대로 못 싸나?'

아침부터 분주하게 담았을 엄마는 보이지 않고, 오늘 또 벌어진 반찬통 참사에 사춘기 마음은 시뻘건 김을 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행복이었다. 당시엔 짜증 나고 구질구질했던 장면이지만, 이젠 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지난한 시간 속에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며 부지런히 담았을 엄마의 마음을. 행복은 늘 그런 걸까. 시간이 지나야 그때의 따뜻함이 보인다. 당시엔 몰랐던 감정이 이제야 느껴진다.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봄에 가만히 눈물 지어진다. 어쩌면 행복은 시간이라는 숙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지난 사진첩을 보면서 종종 느낀다. 당시엔 딱히 행복한 순간들이, 특별한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문득 사진첩을 넘겨보면 그때만의 아련함이 느껴졌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애틋한 시간. 동영상 속 흘러가는 바람의 시간. 나뭇잎이 흩날리고, 청명한 하늘과 바다가 있고, 스쳐 가는 건물들이 있고, 그 순간을 놓칠세라 작은 핸드폰을 고이 들고 가만히 있는, 카메라 밖 내가 있었다.

또한 몇 년 전 아이의 어수룩한 말과 새침한 표정이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싱긋 웃는 모습과 작은 몸짓들이 소중히 담겨 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한 모습들이 시간이라는 터널을 지나 행복의 옷을 입고 현재로 날아와 미소를 전했다. 행복은 기억 속 저편, 흐릿해져야만 알 수 있나 보다. 나 그때 행복했노라고. 우리 그때 참 좋았다고.


현재형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지금껏 내 행복은 과거형이었다. '행복하다'라고 느낀 적은 딱 한 번. 모두 다 '행복했다' 였다. 현재형을 느꼈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안했던 취준생 시절의 일요일 오전이었다. 언니와 한방을 쓰던 그때, 아침을 먹고 노곤한 열 한시를 지나고 있었다. 침대 위 한쪽에 개켜진 이불 더미에 기대 누워서는 들숨 날숨에 오르내리는 배를 느끼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는 나른한 바람이 들어와 자장가를 불러줬고 넓적한 초록 감나무 잎 사이로 적당한 그늘과 햇살이 번갈아 비췄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며 오롯이 느꼈던 충만함. '아, 행복하다...' 느끼는 찰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언니는 "마음 편히 자"라고 툭 말했지만, 지금 내가 낮잠을 즐기며 행복을 운운할 때인가 싶어 다시 행복을 저만치 등지고 말았다.



행복했던 순간이 찰나 느낀 햇살과 바람 그리고 낮잠이라니.

비싼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도 아니고, 눈 내리는 연말 발레 공연도 아니다. 그때 모두 '나 참 행복하구나' 생각했지만, 그건 행복이 아닌 설렘, 기쁨, 환희 그리고 스스로 이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트로피 같은 순간이었다. 밍밍하고 맹숭하지만, 끝없이 차오르는 행복은 아니었다.


우리는 스치듯 빠져나가는 행복을 좇으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은 도처에 널려있다. 찰나를 인지하고 명명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 가리고 먼 미래의 행복만 꿈꾸고 있다.

'두 다리가 있어 감사하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어 감사하다. 오늘도 굶지 않음에 감사하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감사 인사를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종교가 없는 내겐 감사 인사는 곧 신앙의 의미였다. 신의 품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같아 다소 거리가 먼 행위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란 인간은 맥주를 마시며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되었다.' 느끼는 알루미늄 인간 아니던가. 마시기 직전 맥주캔을 냉동실에 넣어둔 자신을 쓰다듬으며 "오늘도 맛있는 맥주를 위해 하루를 버텨내 감사합니다."라고 읊기엔 뭐랄까.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사회가 바라는 인사는 아니지 않은가. 내 인사에는 알코올과 짜릿함 그리고 무엇보다 선 넘는 취기가 있기에.


그래서 나만의 방식대로 행복의 '장면'을 찍으려 한다. 플래시처럼 한 번 번뜩이는 그때, '아, 감사하다' '아, 행복하다.'라고 읊조려 내 하루를 건져내려 한다. 그 모습은 가령 이런 것들일 테지.


6년째 키우는 고무나무의 연둣빛 새순을 바라봤을 때 너의 자람이 기특해 자꾸 매만지게 된다. 이렇게한 뼘 자라느라 애쓰고 있다, 또 자라주어 고맙다며 반들반들한 연한 잎을 눈 안에 가득 담는다.

과거 보온 도시락 속 김치 지짐이 한데 섞여 눅눅하고 시큼한 감자채를 다시 소환한다. 소복이 담았던 반찬이 옮겨지며 물들었던 그 모습. 뚜껑을 열자마자 '아, 엄마 또!'라는 배은망덕한 마음 대신 조금이라도 더 먹길 바라는 엄마의 새벽 마음을 떠올린다. 오늘은 어떤 반찬을 만들어야 하나, 빠듯한 냉장고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민했을 마음, 이번에는 감자가 물들지 말아야 할 텐데 조심히 담았을 마음 말이다. 어쩌면 엄마는 무심히 툭, 넣었을지도 모를 장면에 내가 시시콜콜 의미 부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제는 행복한 순간이 되었다. 투정 부리며 면박을 주었던 장면이 사랑과 행복의 영역으로 재포장돼 보온 도시락만큼이나 따뜻하다.


이렇게 나만의 새 단장을 거친 장면들을 차곡히 모아 행복의 사전을 만들어야겠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떠올리며 다시 또 밍밍한 순간들을 모아야지. 별거 없는 그 순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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