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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Nov 28. 2024

오늘의 커피 대신 오늘의 첫눈

아내가 아프면 남편은 갑자기 말을 잃는 것인가. 덤덤히 얘기하지만 슬리퍼가 질질 끌리기 시작했고, 자꾸만 내 머리를 만지고 확인한다. 오늘은 어떤지, 머리가 많이 아프진 않은지. 그리곤 아이들에게 엄마 말을 잘 들으라며 당부한다. 머리는 예민한 부위라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테고, 너희가 엄마말을 잘 들어야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얘길 건네는 그에게 '괜히 또 저런다'는 눈빛을 보내보지만, 슬리퍼가 바닥과 하나가 되고 있을 뿐이다. 

아내가 아프지만 회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막차에 겨우 몸을 실은 시각에 문자가 왔다. 우리 와이프가 아파서 술을 마셨다, 건강하게 오래 살자, 나보다 1년만 더. 라는 취중 문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정도면 내가 더 아파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인데 더 이상 머리가 찌릿찌릿 하지 않다. 예약된 병원 진료를 취소해야 하나 싶기도 한데 그의 술주정은 중증 아내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니. 

'거 아저씨, 눈이 온대요. 조느라 정류장 지나치지 말고 안전하게 들어오세요.' 




첫눈이 왔다. 아침 일찍 커텐을 젖히자 1년여 만에 보는 설경에 벅찼다. 멀리 보이는 산은 제주도의 눈꽃을 생각나게 할 만큼 쉽게 보지 못할 절경이었다. 난간에 제법 쌓인 눈은 소담히 앉아 있었고, 창문을 열어 얼른 그 차가운 눈 이불에 손끝을 얼얼한 빨강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이제 정말 올해가 한 달여 남았구나, 이제 조금 있으며 이번 해도 안녕이구나 싶어, 짧은 순간에 마음이 슬픈 설렘으로 가득 찼다. 


아직도 눈이 내린다. 첫눈이란 놈이 눈치도 없게 쏟아진다. 아이들 얼굴에 깜짝선물을 정도, 새초롬한 귤과 딸기에 보송한 이불을 덮어줄 정도만 내리지, 속절없이 내린 가을 눈에 우린 모두 당황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무게에 단풍잎들은 고개를 숙였고, 쓸고 쓸어도 금세 쌓인 눈은 빗질을 움켜쥐고 한숨을 내쉬게 했다적당히. 적당히 내려주면 좋을 텐데.

우리 인생에 적당하게 알맞은 순간은 없는 걸까.




아침부터 소란이 움직였다.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곤조곤한 디제이의 음성과 날리는 눈발, 조용한 캐럴은 목적지와는 상관없이 들뜬 마음이 들었고, 얼른 진료를 마치고 뜨거운 커피를 손안에 가득 담고 싶었다. 

병원 창문으로 보는 눈발은 소리가 제거된 듯 조용했다. 환자복을 입고 수액 걸이를 끌며 날리는 눈을 맞는 사람. 근심 어린 마음으로 진료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막 채혈을 마치고 거즈로 지혈하고 있는 사람, 키오스크 앞에서 영수증을 들고 버벅대고 있는 사람. 엘리베이터의 알림 소리와 분주한 걸음걸이를 뒤로하고 눈이 참 조용히도 내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듯, 슬로우모션을 건 것처럼 천천히 내려오는 눈들이, 아픔을 잊고 잠시 행복한 것들만 바라보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눈이 와요, 눈이.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묵중한 문을 밀고 진료 의자에 앉았다. 증상에 대한 얘기를 건네고 알 수 없는 의학 용어가 종이에 적히더니, 의사가 말문을 열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들은 마치 창밖에 내리는 고요한 눈 같았다. 다소 소곤거리며 무거운 증상은 아닐듯하다는 안도가 섞인 눈송이를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마치 첫눈 같은 증상일 뿐, 괜찮을 거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사 예약을 하지만, 그래도 폭설에 갇힐 정도는 아니라는 적당한 말을 건넸다.

그제야 남편은 조금 안도한 보였고, 머리를 가볍게 만지기도 했다. 진료 예약이 먼저인지라 생일 데이트는 시간을 조정해야지만, 그래도 이젠 그에게 내리는 눈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듯했다.

"첫눈을 같이 보네."



누군가에게는 질퍽하고 근심 가득한 첫눈이었을 테지만 내겐 적당했다. 

'내가 내리고 있잖아요. 겨울은 오고, 눈은 내릴 거예요. 나를 바라보는 순간을 잊지 말아요.' 

당연하게 내리는 눈이 당연하지 않음을, 차갑고 포근한 눈을 맞는 일상이 평범치 않은 순간임을. 눈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 옷을 여미며 눈을 털어주는 지금이 딱 내 인생에 알맞은 시간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그렇게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는 아이의 얼굴을 종종 만졌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살짝 오므린 손에 내 손가락을 얹어 무릎을 맞닿고 잠을 청했다. 익숙한 것들이 익숙하지 않은 순간이 올 것임을, 서로의 무릎이 전해준 온기가 그리울 것임을 깨닫고 부지런히 눈에 담았던 시간이었다. 우산을 들고 교문 앞을 서성이는 일, 무거운 책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일, 급식 반찬에 관해 묻고 다소 높은 웃음소리를 공유하는 일. 지겹고 지루했던 모든 일들이 첫눈처럼 소중해서 마음이 폭신했던 며칠이었다. 아픔이 전해준 일상의 소중함은 무서울 만큼 행복한 것이었다. 첫눈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듯, 내 일상에 내리는 그날의 첫눈을 보지 못한 지난 시간은 얼마나 질척거렸을까. 젖은 운동화를 보는 마음이 아닌, 생생한 순간을 즐기는 일상이 되기를, 조금 내려놓고 따뜻한 마음으로 오늘의 첫눈을 소담히 바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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