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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05. 2024

scene 3. 낭만에 취하다

드라마를 봐도 의식적으로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보는 사람이 바로 30대의 나다. 리모컨을 눌렀지만, 그렇다고 내 시간을 온전히 너에게 맡긴다는 건 아냐. 리모컨의 주인은 나고, 다음 회차 선택 여부도 내게 달렸어. 고로, 난 너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어!라고 외치기 전에 다음 회는 이미 상영되고 있었다. 이런, 또 져버린 거야? 화면에 시간을 저당 잡히고, 몸은 깊숙이 빨려만 갔다. 클라이맥스에 따라 동공의 뻑뻑한 움직임이 전해지자, 사이드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됐다. 삑- 명령에 따라 눈꺼풀은 느린 속도로 깜빡이더니 정전과 함께 셔터가 내려갔다.

'됐어. 이제 그만.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자.'




재생 버튼은 쉽사리 눌리지 않지만, 한번 시작되면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이십 대 시절,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극장에서 영화 '해운대'를 보던 중, 회 한 접시와 찰랑이는 두꺼비 잔이 나오자, 어둠 속에서 우리의 눈빛은 소주보다 맑게 빛났다. 무언의 끄덕거림 후, 영화가 끝나자마자 횟집을 찾았다. 패기 어린 대학생은 소주를 몇 병이나 불러들이고 "우리 이렇게 마셔도 취하지 않네."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꼬르륵 잠기고 말았다.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폴더폰 속 문자를 보고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 어제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 친구의 술 냄새 풍기는 문자에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간신히 답을 보냈다. "우리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다시는 그렇게 마시지 말자, 누구 하나 꽐라되기 전에 말리자, 또 그렇게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각종 금주 표어를 만들며 결의를 다진 우리는 어스름한 저녁, 아늑하게 퍼져 나오는 노란 불빛에 이끌려 조개를 굽고 있었다. 그 옆은? 갈색 병과 초록 병이 아름다운 패턴을 이루고 있었고.




그게 좋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비우며 이십 대의 영원할 것 같은 고민을 밤새도록 나누는 시간이. 어떻게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어색한 내 경험을 끌고 와 친구의 다문 입술이 가벼워지길 바랐다. 지갑 두께는 터무니없이 얇았지만, 그건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함께 앉을 의자가 있고, 패기 어린 술잔이 치솟다 안착할 테이블이 있다면 그걸로 됐었다. 갑자기 어른의 세계로 뚝 떨어진, 열아홉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막막한 고민마저 멋스러웠다. 오히려 어른이라면 개운치 못한 슬픔으로 뒤섞인 미래는 꼭 필요한 명제와도 같았다.

안주는 상관없었다. 케첩과 마요네즈가 요란하게 뿌려진 양배추 한 접시면 충분했고, 기름을 흠뻑 머금은 치킨과 얼음 잔에 담긴 맥주는 사치스러운 어른의 맛이었다. 오늘이 끝나도 내일 다시 이어지는 설익은 고민이 좋았기에 우리는 다시 만나 어제와 별반 다름없이 잔을 채웠다. 월미도 바이킹처럼 불안정한 날들은 찬 바람에도 옷깃을 풀어 헤치고 볼 빨간 웃음을 함께하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낭만이란 이름 아래 나풀거렸다.

닭발집의 빨간 플라스틱 원형 테이블도, 균형이 맞지 않아 취할수록 기울어지는 의자도, 살짝 풀린 눈으로 철제문 앞에 기댄 채, 다리 꼬던 날들도. 다소 유치하게 술김을 빌려 넌 내가 가장 의지하는 친구라는 말을 건네고 쑥스럽게 잔을 맞댄 추억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사라졌다. 한 여름밤 노상에서 맞던 달짝지근한 바람 냄새는 데워진 마룻바닥을 타고 올라온 반찬 냄새로 뒤덮였다. 10시가 좀 못 된 밤, 집안을 가득 채운 윤기 없는 냄새에 내 스무 살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서른이 되기 전 탈피했을까. 좀체 자유분방한 그것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결혼과 동시에 눅눅한 바닥으로 녹아내린 게 분명하다. 한 번씩 들쑤시는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엄마라는 이름의 두터운 철제 압력기는 최대치의 힘으로 찍어 눌렀다. 형체 없는 격한 들썩임이 용솟음칠 때마다 이곳의 공기가 유난히 답답해 냉장고 속 맥주캔을 열어젖혔다. 거친 목 넘김과 동시에 단전에서 으르렁거리는 용트림이 울렸다. 들썩이던 영혼은 그제야 숨을 고르며 원래의 유순한 모습을 되찾는다.

낭만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수없이 부딪히고 넘실거리던 투명한 파도가 날아가 버렸다. 그 자리는 이제 버티기 위해 마시는 맥주가 자리 잡았다.




사실 맥주는 술이라기보단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착화제다. 얼기설기 쌓여있던 두서없는 마음에 맥주 한 잔이 들어가면 타닥타닥 마음이 옮겨붙고 따뜻함이 남았다. 올라간 어깨가 다소 굽어지며 빗장을 풀어헤친 마음엔 저 깊은 얘기를 꺼내도 될 것만 같은 용기가 작게 꿈틀거렸다. 몰랑몰랑한 작은 거인의 심장은 스무살의 어스름한 저녁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사실 말이야.'

그저 쑥스럽단 이유로, 굳이 감정 상한다는 이유로,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는 연유로 눌러버렸던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달싹이는 입술로 마음을 넘겨줬다. 농익은 시간은 서로를 물들였다. 번짐의 순간이 오래가지 않더라도, 취기가 깨면 사라지더라도, 노오란 불빛 아래 진솔했던 시간은 가슴에 안착한 채 잔불로 남았다.

사라졌다고 여긴 낭만의 불씨가 어디선가 작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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