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서사는 은밀해야 한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담요는 흘러 내리고, 가까이 앉은 서로의 숨결 소리만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그녀)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티비 볼륨을 더 낮추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어정쩡한 모습에 맥주 한 모금을 마셔보지만, 온전한 정신은 붙잡을 수 없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귓불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목소리와 은근하게 터치되는 서로의 몸. 입을 막고 웃으며 머리카락 사이로 상대의 얼굴을 흘깃거린다. 우리 지금 그러니깐..... 시그널 맞지? 이거,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연애는 본인이 해도 맛있지만, 진정한 꽁냥거림과 까무러침을 생각하면 옆에서 직관하는 연애가 최고다.
자, 이제 우린 고등학교 교실 또는 대학교 강의실로 시간여행을 한다. 눈앞에 펼쳐진 모니터는 책상으로 바뀌고, 그 시절, 그 냄새로 타임슬립해서 다소 꽉 끼는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는다. 선생님이 계시지만 그건 상관없다.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책상 가운데 놓고, 손만 바삐 움직인다.
"그래서. 오빠가 뭐래?"
"딱히 뭐라 말을 한 건 아닌데, 있잖아. 그 분위기."
친구가 끄적인 글씨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동그래진 진실의 눈으로 하얀 실내화 속 발을 동동 구를 뿐. 연애하는 당사자도 아닌데, 간질간질하게 꽃봉오리가 막 피어오르는 마음은 뭐지? 느리게 가는 분침에 원망스럽다는 으름장을 놓아보지만, 소녀들 마음에는 성에 안 찬다. 드디어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교과서를 덮고 교실을 나가자, 육성이 터져 나온다.
"웬일이야!! 주연이 고백받았대!!!"
동시에 우르르 몰린 여고생들은 히터에 빨개진 볼인지, 사랑의 맛을 본 홍조인지 모를 벌건 볼을 한 채 의자를 에워싸며 소리 지른다. 그래, 우리의 연애는 이랬다. 그 오빠들은 모를 것이다, 자기가 대체 몇 명과 연애를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말 한마디가 교실 온풍기에도, 교탁 위에도, 사물함 속 체육복에도 내려앉아 같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소개팅할래?"
"음..... 소개팅?"
전해 받은 번호를 저장하자, 카톡이 뜬다. 프로필 사진을 누를까 말까, 만나기도 전에 실망할까 봐 주저한다. 내 느낌과 다른 사진들이 뜨면 호감이 식지만 소개해 준 이를 생각해 딱 한 번만 만나보자, 결론 내린다. 혹시 뒷모습이나 그림자 사진이 뜨면, 대략적인 피지컬을 상상한다. 핸드폰 너머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운명의 상대가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었다. 목소리가 통과되면 평면의 그림자는 세로로 세워져 턱시도로 갈아 입었고, 그 옆엔 흰 면사포를 쓴 그림자가 포개 있었다. 소개팅은 서로의 안녕을 묻는 달콤한 연애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계절과 함께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지기도 했다. 몇 해간 반복된 사랑과 헤어짐의 시간은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놨다. 달라진 거라곤 추가된 주름살만 있었을 뿐.
퇴근 후, 늘어진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집게 핀으로 고정한다. 클렌징 오일을 듬뿍 묻혀 늘어난 모공을 마주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냉장고 문을 세차게 젖힌다. 딱히 밥 생각은 없다. 빵빵한 냉기 속에 온몸을 꽁꽁 얼려놓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소파에 푹 안긴다. 하루의 마무리를 거세게 넘기며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하아, 이게 천국이지.
"소개팅할래?"
"귀찮아."
것도 이십 대의 열정이나 가능했다.
연애는 시간과 마음을 쏟을 준비가 됐을 때만 가능성의 수치를 매길 수 있었다. 내 삶에서 노란 배춧속 떼듯, 뚝 떼어 놓을 여유가 있을 때만 요동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있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일과 내 결재가 필요한 순간이 많아질수록 연애는 쌓인 서류뭉치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맥주 한 캔과 OTT 속 남의 연애에 몰입한다. 현실은 펑퍼짐한 츄리닝을 입고 마른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고 있지만, 화면 속 그녀의 눈물에 과몰입하게 된다. 그녀가 곧 나다. 그녀의 상처는 내 연애의 실패담이다. 마음이 아려오며 오징어 씹는 속도가 느려진다. 쿰쿰한 손은 눈물을 훔치다 반려 핸드폰을 잽싸게 가져온다.
"야, 이거 봤어?"
"아직. 나 요즘 야근이라 매일 뻗음. 낼부터 정주행할 거야!"
"빨리봐봐ㅜ 과몰입ㅜ"
서로의 지난 연애를 공유했던 친구들은 티비 속 일반인의 연애를 시청하며 온라인 연애를 이어간다. 지금은 아기 엄마가 되어 합법적인 연애가 금지된 A도, 이른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B도, 야근 서류와 깊은 연애 중인 C도. 모두 화면 속 그녀로 둔갑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방구석 연애에 대리만족하고 있었다. 현실 연애는 불확실함과 시간 낭비라는 키워드로 둔갑해 효율적인 타인의 연애를 찾게 했다. 우리는 x로부터 미련이 남은 청순가련형 주인공이 됐다가, 썸남의 한쪽 어항이 됐다가, 돌싱에게 찾아온 백마 탄 왕자님과 연애했다. 어떤 역활에 심취하고 싶은지 그날의 감정에 맞는 선택형 연애는 한껏 꾸미지 않아도 됐고, 빨리 감기로 확실한 결과 또한 알 수 있었다. 지난날, 사연 있는 여자를 자초하며 두루마리 수십 롤 적셔 본 여인은 이젠 침대와 소파를 떠나지 않아도 됐다. 심지어 틀어 올린 머리, 츄리닝 입은 모습으로 생라면을 씹으면서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마사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OTT 속 연애 프로야말로 이 시대의 가성비 로맨스가 아닐까. 다 떨어진 맥주 방울을 탈탈 털어놓고, 두번째 캔과 함께 과몰입할 다음 여주인공을 찾아 빠른 스크롤을 내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