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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19. 2024

secene 4. 연애는 방구석이 제 맛.

모든 서사는 은밀해야 한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담요는 흘러 내리고, 가까이 앉은 서로의 숨결 소리만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그녀)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티비 볼륨을 더 낮추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어정쩡한 모습에 맥주 한 모금을 마셔보지만, 온전한 정신은 붙잡을 수 없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귓불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목소리와 은근하게 터치되는 서로의 몸. 입을 막고 웃으며 머리카락 사이로 상대의 얼굴을 흘깃거린다. 우리 지금 그러니깐..... 시그널 맞지? 이거,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연애는 본인이 해도 맛있지만, 진정한 꽁냥거림과 까무러침을 생각하면 옆에서 직관하는 연애가 최고다.

자, 이제 우린 고등학교 교실 또는 대학교 강의실로 시간여행을 한다. 눈앞에 펼쳐진 모니터는 책상으로 바뀌고, 그 시절, 그 냄새로 타임슬립해서 다소 꽉 끼는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는다. 선생님이 계시지만 그건 상관없다.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책상 가운데 놓고, 손만 바삐 움직인다.


"그래서. 오빠가 뭐래?"

"딱히 뭐라 말을 한 건 아닌데, 있잖아. 그 분위기."


친구가 끄적인 글씨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동그래진 진실의 눈으로 하얀 실내화 속 발을 동동 구를 뿐. 연애하는 당사자도 아닌데, 간질간질하게 꽃봉오리가 막 피어오르는 마음은 뭐지? 느리게 가는 분침에 원망스럽다는 으름장을 놓아보지만, 소녀들 마음에는 성에 안 찬다. 드디어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교과서를 덮고 교실을 나가자, 육성이 터져 나온다.


"웬일이야!! 주연이 고백받았대!!!"


동시에 우르르 몰린 여고생들은 히터에 빨개진 볼인지, 사랑의 맛을 본 홍조인지 모를 벌건 볼을 한 채 의자를 에워싸며 소리 지른다. 그래, 우리의 연애는 이랬다. 그 오빠들은 모를 것이다, 자기가 대체 몇 명과 연애를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말 한마디가 교실 온풍기에도, 교탁 위에도, 사물함 속 체육복에도 내려앉아 같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소개팅할래?"

"음..... 소개팅?"


전해 받은 번호를 저장하자, 카톡이 뜬다. 프로필 사진을 누를까 말까, 만나기도 전에 실망할까 봐 주저한다. 내 느낌과 다른 사진들이 뜨면 호감이 식지만 소개해 준 이를 생각해 딱 한 번만 만나보자, 결론 내린다. 혹시 뒷모습이나 그림자 사진이 뜨면, 대략적인 피지컬을 상상한다. 핸드폰 너머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운명의 상대가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었다. 목소리가 통과되면 평면의 그림자는 세로로 세워져 턱시도로 갈아 입었고, 그 옆엔 흰 면사포를 쓴 그림자가 포개 있었다. 소개팅은 서로의 안녕을 묻는 달콤한 연애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계절과 함께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지기도 했다. 몇 해간 반복된 사랑과 헤어짐의 시간은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놨다. 달라진 거라곤 추가된 주름살만 있었을 뿐.

©unsplash

퇴근 후, 늘어진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집게 핀으로 고정한다. 클렌징 오일을 듬뿍 묻혀 늘어난 모공을 마주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냉장고 문을 세차게 젖힌다. 딱히 밥 생각은 없다. 빵빵한 냉기 속에 온몸을 꽁꽁 얼려놓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소파에 푹 안긴다. 하루의 마무리를 거세게 넘기며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하아, 이게 천국이지.


"소개팅할래?"

"귀찮아."


것도 이십 대의 열정이나 가능했다.

연애는 시간과 마음을 쏟을 준비가 됐을 때만 가능성의 수치를 매길 수 있었다. 내 삶에서 노란 배춧속 떼듯, 뚝 떼어 놓을 여유가 있을 때만 요동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있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일과 내 결재가 필요한 순간이 많아질수록 연애는 쌓인 서류뭉치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맥주 한 캔과 OTT 속 남의 연애에 몰입한다. 현실은 펑퍼짐한 츄리닝을 입고 마른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고 있지만, 화면 속 그녀의 눈물에 과몰입하게 된다. 그녀가 곧 나다. 그녀의 상처는 내 연애의 실패담이다. 마음이 아려오며 오징어 씹는 속도가 느려진다. 쿰쿰한 손은 눈물을 훔치다 반려 핸드폰을 잽싸게 가져온다.


"야, 이거 봤어?"

"아직. 나 요즘 야근이라 매일 뻗음. 낼부터 정주행할 거야!"

"빨리봐봐ㅜ 과몰입ㅜ"

©unsplash

서로의 지난 연애를 공유했던 친구들은 티비 속 일반인의 연애를 시청하며 온라인 연애를 이어간다. 지금은 아기 엄마가 되어 합법적인 연애가 금지된 A도, 이른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B도, 야근 서류와 깊은 연애 중인 C도. 모두 화면 속 그녀로 둔갑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방구석 연애에 대리만족하고 있었다. 현실 연애는 불확실함과 시간 낭비라는 키워드로 둔갑해 효율적인 타인의 연애를 찾게 했다. 우리는 x로부터 미련이 남은 청순가련형 주인공이 됐다가, 썸남의 한쪽 어항이 됐다가, 돌싱에게 찾아온 백마 탄 왕자님과 연애했다. 어떤 역활에 심취하고 싶은지 그날의 감정에 맞는 선택형 연애는 한껏 꾸미지 않아도 됐고, 빨리 감기로 확실한 결과 또한 알 수 있었다. 지난날, 사연 있는 여자를 자초하며 두루마리 수십 롤 적셔 본 여인은 이젠 침대와 소파를 떠나지 않아도 됐다. 심지어 틀어 올린 머리, 츄리닝 입은 모습으로 생라면을 씹으면서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마사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OTT 속 연애 프로야말로 이 시대의 가성비 로맨스가 아닐까. 다 떨어진 맥주 방울을 탈탈 털어놓고, 두번째 캔과 함께 과몰입할 다음 여주인공을 찾아 빠른 스크롤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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