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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20. 2023

엄마, 미안해. 내가 배가 불렀었어.

밑반찬에 대한 성찰

    '칙취이이이이이익-쿡 쿠'

    '으음, 으으으으윽-! 벽 너머 들리는 소리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혈액을 방류한다. 도마에서 송송 썰어지는 쪽파, '치이이익' 김빠지는 밥 짓는 선율, 끓다 못해 흘러넘치기 일보 직전의 된장찌개와 가끔 침 묻혀 신문 넘기는 소리는 아침을 깨우는 자명종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한쪽 구석에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들지만, 시선은 갈 길을 잃고 손이 뻗어지지 않는다. 식탁은 손흥민 없는 국가대표 경기처럼 그 나물이 그 나물이다. 집 앞 벼슬 높은 닭 알로 만든 달걀찜, 어제도 먹고 일주일 전에도 먹었던 멸치볶음, 달래 쫑쫑 썬 간장과 곱창 김, 들기름 발라 살짝 구운 김. 여기에 여름 한정 빠질 수 없는 오이. 텃밭에서 자라 자기 개성 강한 오이를 바로 따서 만든, 얼음 동동 오이지와 꼬들꼬들 오이지무침, 오이소박이에 가끔 오이냉국까지 곁들이면 '오이 환장 밥상' 완성이다. "또 오이야? 이것도 오이, 저것도 오이, 오이 빼면 반찬이 없네!" 지금 생각하니 오이 먹다 오이로 맞아도 어이없지 않을 말대꾸 시전이었다. 이제는 "엄마, 오이지 좀 무쳐줘, 반찬 없을 때는 오이지만 한 게 없지!"라며 늙은 어미 손목 나가는 오이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오이지를 우리 집 꼬맹이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 아기 때부터 먹어 버릇해서 그런지, 짭쪼름한 국물에 적셔있는 오이지를 덥석덥석 먹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역시, 입맛 없을 때는 오이지가 최고지!"

"할머니, 깻잎은 없어?"

간장에 조린 깻잎을 손으로 쭈욱 찢어 갓 지은 쌀밥에 올려주니 밥이 숭덩숭덩 없어진다. 8살 아이의 입맛이 맞나 싶게 바다는 할머니 집 반찬을 매우 좋아한다. 할머니가 해준 반찬을 집에서 똑같이 차려줘도 같이 먹는 사람이 달라 그런지 할머니 집에서 비우는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한다.

<동치미와 오이지만 있으면 반찬 한 칸은 쉽게 채우지>


    여름이 오이지와 깻잎의 계절이다면 지금은 살얼음 동동 동치미의 계절이다. 아이들 김치는 친정 찬스를 쓰고 있어 항상 감사한데 그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동치미다. 새하얀 무를 나박나박 썰어 시원한 국물을 끼얹어 주면 소화제가 필요 없다. 어떤 반찬과 함께 먹어도 이만한 사이드가 없고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마저 재밌어서 아이들 입은 오늘도 열심히 운동 중이다. 따뜻한 누룽지와 같이 먹어도 그만, 고기반찬 하나 먹고 시원하게 국물 한 번 마셔도 좋고. 동치미 없었으면 이 계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게 우리 집의 든든한 마무리 투수 되겠다.


<살얼음 가득 시원한 친정표 동치미>

    

    아이를 키우다 보니 지난 시절 엄마의 식탁이 가장 손 많이 가는 정성의 본보기였음을 실감하고 있다. 메인 반찬 하나 뚜렷하게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영양 가득한 음식이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요술 지팡이로 차려 낸 밥상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매번 "이것밖에 없어? 맨날 똑같네."라며 반찬 투정한 내 입을 지팡이로 톡톡 두드려주고 싶다. 어디 감히 배가 불러서 진수성찬을 내버려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는지! "너랑 똑같은 딸 낳아봐야 정신 차리지!"라는 엄마 말이 그렇게 무서운 말이였는지 그 말의 효험을 깨닫고 뉘우치는 중이다.




    사람이 "이해해."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상대방의 상황이라 감정 이입해도 그건 한순간이기 때문에 당사자의 상황을 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새벽부터 일어나 없는 생활비를 쪼개가며 매일의 반찬을 생각하고 준비했을 엄마의 고단한 아침은, 아이를 낳고 의무적으로 밥상을 차려야 되는 '엄마'가 되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먹었던 밥상은 엄마의 희생이었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불 속에 숨고 싶을 때도 엄마는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셨다. 그것도 시할머니 반찬을 따로 만들고, 시부모님의 입맛을 고려하고, 아빠의 출근 시간에 맞춰 매번 갓 지은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수고스러웠을까. 기껏 차려내면 입맛이 없다며 밥숟가락 놓는 사람도 있고, 매번 똑같은 반찬이라며 반찬 투정하는 사람도 있고, 바쁘다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우리가 당연하게 느꼈던 아침의 일상은 엄마의 하루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이제서야 느끼다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게다가 아직도 엄마 밥상을 원하고 있는 처지라니, 친정엄마의 희생은 언제 끝이 날까.



주말 점심, 친정엄마에게 가장 반가운 전화를 미리 건다.

"엄마! 점심 사 갈 테니까 밥하지 마!"

"매번 뭘 사와, 그냥 있는 반찬에 먹으면 되지"라며 격양된 목소리를 내뱉다가도 어느 날은 이보다 반가운 소리는 없다는 듯 대답이 바로 나온다.

"응, 좋지~"

엄마의 경쾌한 말소리에 오늘의 효도를 테이크아웃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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