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출동한 날, 갑자기 눈이 내린다. 항상 집 근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광장에 북적이는 아이들을 보았는데, 집 밖에서 보는 눈은 아줌마에게도 설렘을 가져다준다. 눈 오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언제인지. 눈은 하얀 '색'이 아니라 사라락 하는 '소리'였구나. 하얀 소리가 내게도 설렘을 가져다줬다. 포장마차 호프집 너머로 젊은 커플들이 밀착해 종종거리며 지나간다. 날리는 눈발에 사진을 찍어주려 멈추는 몸짓이 추위를 멈춰 세운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웃음짓고 상대에게만 모든 세포가 열리는 경험, 그 아련한 시간이 너무 오래전이라 하얀 눈에 기대 지나간 연인들을 회상해 본다.
필자의 연애를 집어보자니, 한 손가락으로는 넘치고, 두 손가락으로는 부족한 인연들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다운 연애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학생만이 느낄 수 있는 풋풋함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중에 딸 아이가 그 나이 때 연애한다면 말리지 못할 것이다. 당장의 성적에는 크나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더라도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연애를 어찌 말릴 수 있을까. 그 귀한 감정은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이불킥하며 두고두고 후회할 감정이라도 이불을 갖고 있는 사람과 이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삶의 몽글함이 확연히 다르므로.
그 시절, 나도 그랬다. 친구와 남자 친구 사이, 그 어디쯤을 지나며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문자 하나 보내고 답이 오기까지 액정만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렸던 일. 고백을 받으며 밤새 들었던 전람회의 '취중진담'. 충전기를 꽂아가며 새벽까지 이어진 통화에 귀가 화상 입을 것 같았던 풋사랑의 열정. 이내 동이 터서 새벽 첫 차를 타고 같이 등교 했던 일. 어렴풋이 첫 키스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눈치채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돌려본 수백 개의 시나리오. 물컹한 느낌과 함께, 종소리가 울리지 않아 지금껏 읽은 만화책은 모두 다 거짓말이라는 확인 사살. 열일곱 살에만 할 수 있는 서툴고 미련하고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짓.
지금 보면 너무 솔직하고 투명해 모든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꺼내 보였다. 물에 젖은 휴지처럼, 한 번 시작된 감정은 마음을 온통 적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랬던 너와 보낸 수많은 낮과밤의 페이지가 고스란히 저장돼 내 마음의 책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이 페이지는 다시 쓸 수도, 수정할 수도 없이 오롯한 그때의 감정으로 눈 오는 날에 설렘을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
도서관에서 잠든 내게 몰래 전해준 캔 커피, 노래방에서 불러준 토이의 노래들, 국토대장정 때 우연히 다시 마주친 너와 나, 버스 맨 뒷자리에서 빌려준 어깨, 닫히는 지하철 사이로 던져 준 외투, 외근 나왔다가 회사 근처 빵집에 맡겨 놓은 케이크, 맥모닝을 준비해서 태워준 주말 출근길, 새벽에 자다 깨서 데려다준 퇴근길, 잡을 듯 말듯 손등을 스치며 걸었던 그 밤.
그리고 너희와 보낸 썩 시답지 않았던 순간들 마저 시간의 필터를 통해 아련해졌다. 상대보다 내가 소중했던 이기심,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었던 질투심,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했던 순간들 마저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 더없이 소중하기만 하다. 이젠 너라는 사람이 아닌 그 시절의 우리가 그립다. 더 자세히는 자유로웠던 내가 그리울 수도 있겠다.
계절의 향기가 연애 세포를 깨우며 잠시 그때의 나를 소환한다. 그리곤 내게도 지금 저 연인들의 설렘이 있었단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그러니 지금의 평온함에 너무 서글퍼 말라고. 너 또한 사랑스러운 페이지의 주인공이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리고 십여 년이 흐른 뒤 지금의 페이지를 아련히 추억할 것이라고 달래준다.
그렇게 순간의 장면들이 모여 감정의 서랍을 차곡히 채워주었다. 언제든 계절의 향기와 함께 꺼내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