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원하는 어벤져스보다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아빠 어벤져스, 즉 '아'벤져스.
그의 활약이 날이 갈수록 'amazing'하니. 우리는 그를 아벤져스라고 부르겠다.
"엄마, 나 밖에 나갈게."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난 둘째는 조용히 내 이불을 덮어주고는 "아빠! 보드게임 하자!" 우렁차게 호출한다. 남편의 루틴은 딸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팽팽하지만 결국 눈치 챙겨야 하는 외줄 타기 보드게임 후, 아이들 요청에 따른 밥 차리기가 되겠다. 아침 댓바람부터 군만두를 먹겠다든가, 새우를 구워달라는 엄마에겐 절대 통하지 않을 주문을 겨울철 찬 바람 부는것 처럼 당연하게 요청한다. 싫단 얘기 한마디 없이 아이들 아침을 차리고, 모닝커피와 함께 부부 아침을 준비한 후 "일어나, 밥 먹자."하는 부름이 들린다. 나야 뭐, 아까부터 일어나 뒹굴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일어난 척, 부스스한 얼굴로 느지막이 거실로 향하면 그만이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육체에 크리스마스 오너먼트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아들, 딸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딱 그 눈높이로 놀아줄 줄 아는 남자,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각종 젤리와 과자를 사 오는 남자. 몸은 피곤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는 사람, 그가 우리 집 가장이다. 사랑을 주는 사람을 기가차게 알아보는 아이들은 오늘도 그래서 엄마 대신 '아빠'다.
"아빠, 오늘도 딱지 접기다! 회사 잘 다녀와!"
아들의 요청인지 명령인지 모를 주문에 남편은 어정쩡하게 "어?어...."라고 대답한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겨울바람 타고 딱지 바람이 불고 있나 보다. 며칠전부터 어떻게 하면 딱지를 잘 접을 수 있을지 별 모양으로 포개도 보고, 테이프도 돌돌 말아보더니 결국 아빠를 호출하는 아들이다.
"색종이 말고 빳빳한 종이 없어? 그래야 안 뒤집힌단 말이야."
어디서 본건 많아 가지고 집에 있는 책 표지는 죄다 뜯어먹을 판이다. 이건 너무 두꺼워서 안 된다느니, 이건 크기가 작다느니, 골디락스의 금발 머리 소녀처럼 'just right'을 찾기 위해 밤 9시가 넘도록 열과 성을 다하는 이 집안 남자들. 이게 이럴 일인가 싶어 차라리 운동을 택하고 밖에 나선다. 집에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는 테이프 감옥에 갇힌 여러 딱지. 둘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던지, '이거 내일 딱지 시합에서 지면 섭섭하겠는데?' 이젠 나까지 의욕 가득, 승전보를 가져다줄 우리의 딱지를 애정하며 찍어봤다.
남편은 평소에 아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고, 가능한 많은 얘길 나눈다. 요즘 또래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학교 수업은 어떤 걸 배우는지, 친구들은 아프지 않고 다 괜찮은지, 점심 반찬은 뭐가 제일 인기인지. 그러다 보면 아이들의 유행을 한발 빨리 들을 수가 있었다. 바다가 유치원 다닐 때는 각종 팽이와 미니카 접기가 아우성쳤는데, 아이와 같이 하다 도저히 시간이 안될 때는 밤마다 엄마 아빠 팽이 공장이 돌아갔다. 색종이를 몇 장씩 집어 들고 '네모아저씨'강의를 열혈 시청할 때면 '우리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현실 자각의 시간이 왔지만, 아침 일찍 팽이의 안부를 물으며 지퍼백에 고이 담아 가는 바다를 보면 '오늘 밤에 또 못 접을 거 없지!' 2차 팽이 공장 예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키우며 '자존감'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요즘 바다와 땅이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키운 새싹이 조금은 단단히 자란 듯, 보상받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바다 친구 엄마들에게 '바다는 참 밝고 행복지수 100 퍼센트인 아이, 사랑받고 자란 게 느껴져'라는 얘길 들으면 지난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마음 따뜻해지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또한 얼마 전 땅이의 마지막 유치원 상담을 받았을 때 역시, '칭찬만 할 순 없지만 정말 칭찬밖에 할 말이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땐 주책맞은 입꼬리에 마스크 덕을 봤다. 친구들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넓은 바운더리를 갖고 있어서 그 안에서는 허용하지만, 그 밖에 해당하면 적당한 거절도 할 줄 안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땅이가 친구들에게 "강이는 정리정돈을 잘해." "다정이는 춤을 잘 춰." "여름이는 다정해."라며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칭찬할 줄 안다고 해주셨다. 이는 내가 아이들에게 더 강조하는 부분인데, 가령 "땅이가 키는 작지만 그래서 뭘 잘할 수 있을까?"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눈다. 땅이를 잘 모르는 동생들이 간혹 "너는 7살인데 왜 나보다 키가 작아? 너 7살 맞아?"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럼 땅이는 나랑 눈을 맞추고 웃어버리거나 집에 와서 얘기한다. "엄마,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 나는 작아서 숨바꼭질을 잘해."라며 삼겹살 기름 튀듯 날아온 상처에 쓱, 얼굴 한 번 닦는 의연함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괜찮은 걸까' 속상한 마음은 나에게만 흔적이 되어버린다.
찬 바람에 몸도 마음도 시린 12월의 나날 속에, 아이들에 대한 1년 치 회고록을 들여다보면 우리 집 아벤져스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겉으로 티 내지는 않지만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용노동부의 아빠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이유 섹션에 나온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아빠효과(Father Effect)
아빠 효과란, 아빠의 육아 참여도가 아이의 두뇌, 인성 등
아이의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아빠 효과’ 라는 용어는 영국의 국립아동 발달연구소가 30여 년에 걸쳐 아동 및 청소년 1만 7천명을 대상으로 장기 조사한 자료를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이 분석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아빠와 교류가 많았다’ 고 나타났습니다.
<기사 출처: 고용노동부 일생활균형 (worklife.kr)>
바다의 경우도 아빠와 친밀한 시간을 많이 보내는데 부자만의 유대감 형성에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차를 좋아하는 바다를 위해 날이 몹시 추운 날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도 2~3시간씩 손 세차에 땀방울을 흘리고 온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 몰래' 콜라와 햄버거를 먹는 행위는 목구멍 따갑도록 톡 쏘는 그들만의 일탈이다. 먹은 영수증을 차에 그대로 놓고 내려 비밀스러운 일탈은 이내 들통나버리곤 하지만, 그들의 다 들리는 속닥거림이 정겹고 눈감아줄 만하다. 이대로 바다가 커서 아빠와의 추억을 다시 대물림 해주는 다정한 아빠가 된다면, 이보다 흐뭇한 일은 없을 텐데... 그래서 우리 집 아벤져스는 오늘도 딱지 공장을 부지런히 가동할 예정이다. 여보! 빨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