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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27. 2023

데이트 신청,
또 받고야 말았습니다.

    "나 아무래도 주 5일은 안 되겠어. 그러면 엄마랑 데이트 할 시간이 없잖아. 오빠는 방학이 길어서 엄마랑 맨날 데이트할 텐데, 나만 못하고.. 으아아아앙"


이게 이토록 서글픈 일인가. 눈 뜨자마자, 오늘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닐 것이라고 선포하더니 이내 주 3일로 변경하고 서글프게 우는 땅이다. 엄마와 데이트가 이토록 소중하다니.... 그 데이트 이제 난 그만해도 되는데.... 라는 말이 얼굴에 티 났으면 어쩌지. 우는 아이 등만 세탁기 탈수하듯 건조하게 두들겨 주었을 뿐이다.



    

    땅이는 유난히, 유독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다. 땅이의 행동을 보면 '엄마'보다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만큼, 딱 그만큼 언어 구사 능력이 우수한데, 하루 종일 참새처럼 쫑알쫑알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이 능력이 그리 반가운 것만도 아니다. 하도 지저귀어서 '쫑알이'라는 별명을 달아줬는데 점점 혀 짧은 쫑알이가 되어간다.

    '자유부인 되는 날'을 탁상달력에 표시해 놓자, "엄마, 이날 또! 친구 만나?"하며 미간을 찌푸린 참새 하나가 앙칼지게 지저귄다. "엄마가 말했지, 너는 유치원에서 맨날 친구 만나고, 놀이터에서 같이 놀고, 친구 집도 가잖아. 엄마는 어쩌다 한 번 친구 만나는 건데 그게 이럴 일이야?" 참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동등하게 한 인격체 대 인격체로써 서로의 욕구는 동등한 법이라는 진리를 깨쳐줘야 한다. 

'너만 놀고 싶니? 나도 놀고 싶다고!'



    

    남편이 물었다. 

"이번 생일 어떻게 할까? 애들이랑 같이 갈까?"

우리에겐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결혼기념일과 내 생일에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둘만이 오붓한 식사를 한다.'이다. 그러나 지난봄, 결혼기념일에 호텔 식사를 하려던 차, 하필 아이들이 눈에 밟혔고 결국 가족 모두 다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출발하는 차에서부터 후회했으니, 차를 오래 타고 이동하는 것에 대해 유난히 투덜거리는 땅이 때문이다. 

"엄마, 얼마나 걸려?"

"엄마, 이제 몇 분 남았어?"

"엄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아직도 멀었어?"

1분 간격으로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닦달에 무슨 세기의 결혼이라도 된다고 괜히 식사를 예약했나 후회했다. 이럴 거면 집에서 혼자 먹는 라면이 더 행복하겠다고. 그냥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가슴 속 깊이 소리쳤고 표정은 메이크업 따위를 뚫고 구겨져 가고 있었다. 오늘도 맘 편히 먹긴 글렀군.




    유치원 방학이 시작된 지 이틀 차, 어제오늘 48시간을 붙어지내고 알았다. 너와 나에겐 틈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뜨자마자 '오늘은 엄마와 무엇을 할까' 야무지게 눈 굴리는 땅이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나도 인간인지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잠시 숨 돌릴 틈이 필요하건만, 이 작디작은 트위터는 틈새를 주지 않고 파고든다. 방학 동안 엄마 품을 독차지하려는 아기 새처럼 입을 쩍 벌리고. 

하지만 안다. 나는 이내 곧 백기를 들고 너를 찬양하겠지.

 © pixabay

     

     오늘도 너와 옹색한 하루를 버티고 작은 네모 속 나의 천사를 보며 잠들 거야.

하루에 지쳐 눈 감기는 이 시간도 핸드폰을 열어 동영상 속 네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지어지는걸. 우스꽝스러운 춤사위, 입가에 가득 묻힌 초코라테 거품, 혀 짧은 소리로 옹알거리며 읽는 네 모습, 눈썹과 입술에 묻은 네 토라짐. 모든 장면을 거슬러 올라 신생아 시절, 배냇짓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핸드폰을 끌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잠든 네가 옆에 있는데. 화면 속 아이를 보며 웃는 나를 보면 때론 소름 끼치기도 해. 현실은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만 집착하는 모습에 말이야. 

    

    하지만 아가, 

진부하지만 너는 나의 햇살. 그 작고 부드러운 코를 보고 만지면 수많은 바람과 파도에 깎인 반짝이는 조약돌 같아. 싱그러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네 얼굴이 윤슬이고, 정돈되지 않고 흘러내리는 잔머리와 점점 벌어지는 유치, 웃을 때 보이는 송곳니를 사랑하지. 길게 내린 속눈썹 사이 눈동자는 까만 우주에 반짝이는 별. (흔해 빠진 표현이지만 별과 보석이 아니라면 너의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무슨 단어로 대신할 수 있을까) 발그스름하고 솜털 가득한 피부는 반질거리지도 푸석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데, 개중 가장 비슷한 촉감이라면 하얀 천사 점토 같아. 말랑이며 들러붙지 않고 탱글탱글하며 기분 좋은. 

    

< 우리의 커피숍 데이트, 너가 애정하는 메뉴>


    얼마나 남았을까. 엄마와 딱풀처럼 붙어있을 시간이. 

곧 너는 친구를 찾아 떠나겠지. 내 옆에 딱풀같이 붙어있던 너는 방문을 딱풀같이 닫고 들어가겠지. 그러면 난, 또다시 작은 네모 속 나의 천사를 만나러 떠날거야. 따뜻한 초코라떼 속 마쉬멜로를 보며 팥죽 앙심같다는 너를. 그리고 배냇짓하며 웃음짓는 너를 보고나서야 핸드폰을 닫을 수 있겠지. 

귀여운 나의 아가. 

오늘도 참 사랑했고, 내일은 더 사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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