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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Jan 02. 2024

이번 방학, 세계 여행 좀 다녀올게요.

    자그마치 두 달이라는 기나긴 겨울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찰나, 땅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국기 퀴즈 하자!" 유치원 누리과정에서 국기에 대해 배울 때 우리 집은 유튜브 "수도송"의 홍수가 범람했었다. "움바 움바 움바리움바 세계 수도송! 한국 서울, 일본 도교, 싱가포르 싱가포르, 중국 베이징, 태국 방콕, 네팔 카트만두~" 이 노래가 얼마나 중독적이냐면 집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움바 움바 움바리움바~"를 읊조리며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입안 가득 채웠다. 




"엄마, 우리 부루마불 하자!" 

"어.. 어...?"

부루마불이라니, 올 것이 왔다. 시작하면 두 시간은 기본 세팅되는 보드게임계의 뫼비우스의 띠. 누구 하나 울고불고 돈을 집어 던져야 끝나는 부루마불을 하잔 말이지? 이 말이 이렇게 두려운 이유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형제가 산 땅은 오죽하랴. 기분 좋게 시작했다가도 누군가 산 도시에, 그것도 호텔 올린 서울, 로마, 런던에 한 번 걸리기라도 하면 자칫 파산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이머를 필두로 시간제한하고 그때까지 모은 부동산과 현금의 합을 구해 A4용지 가득 계산 하다 보면, 땅이든 바다든 한 명은 억울한 눈물을 뚝뚝 흘리게 돼 있다. "이럴 거면 하지 마!" 결국 내 입에선 매일의 레파토리가 시작되고, 행복의 나라로 갈 것 같던 비행은 환장의 나라에 도착해서야 끝이 나고 만다. 

<시작하기도 전에 진 빠지는 부루마불>


    아이가 어려서부터 경험과 독서를 제일 우선시해 많은 여행을 다녔다. 오키나와, 후쿠오카, 괌 등을 비롯해 한 달에 한 번은 국내 여행을 떠났는데 돌이켜보면 아이는 핑계고 내 콧구멍을 위한 흑심이 가득했다. 어차피 집에서 하나 밖에서 하나 육아는 해야 할 터이니, 이왕이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하면 어떠랴. 벚꽃이 지천일 땐 바람 가득 떨어지는 꽃잎을 봐야 한다는 핑계로, 단풍이 서로 얼굴 붉힐 때는 가을 산행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갔다가 끝내 단풍 못지않는 시뻘건 얼굴로 왜 나와 이 돈 쓰며 고생인가 푸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디를 가든 내 마음의 여유가 문제였다. 몇십만 원을 들여온 여행인데 많은 추억을 남겨야 한다는 이유로 각종 체험 수업을 신청했다. 리조트에 있는 시즌별 쿠킹클래스나 키즈체육 프로그램은 필수였다. 한 시간 가까이 분리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체크인 & 아웃을 비교적 한산하게 하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또한 학교에 입학하고 나선 주변에 있는 박물관을 안 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언제 또 오겠어.' 하는 생각으로 아이는 알지도 못하는 어린이 박물관을 예약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주의집중 하지 않고 돌아다니면 왜 이런 것에 관심도 없나 애만 탔다. "바다야, 땅이야. 너희 재밌게 보라고 엄마 아빠가 일부러 예약해서 온 거야. 한 번 둘러보자." 그러거나 말거나 밖에 나가서 뛰놀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뭣 하러여기와 서로 짜증만 내나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려고 왔나?'

© pixabay

    

    정작 아이는 엉뚱한 포인트에서 여행을 추억했다.

"우리 온수 풀 틀었을 때, 똥 냄새 났던 곳 기억나?" 

"엄마, 나 비둘기 소년 아직도 기억나. 그 형아, 옷 안에 새우깡 보고 비둘기들 몰려왔었잖아. 너무 웃겼어." 

"이번에 어떤 차 빌릴 거야? 신형카니발 9인승 진짜 좋았었는데."


아이가 바라는 것은 예쁘게 포장된 체험수업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드라이브하며 차에 빗방울이 가득 맺히기를 바랐고, 바닷가 산책길에서 하는 달리기 시합을 좋아했다. 노을 지는 방파제 옆에서 엄마 아빠가 양쪽에서 손잡고 "점프~"하며 들어 올려 주길 바랐고, 새하얀 침대에서 프링글스를 와작와작 흘리며 입안 가득 먹고 싶어 했다. 아이가 바라는 건 그거였다. 굳이 유명 여행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 그것들을 조금 더 여유롭게 바라봐주는 부모의 다정한 눈빛을 기대했다.

    우리는 모두가 좋다 얘기하는 장소를 몇 달 전 오픈런해서 추억을 만들어 주려 한다. 여행 인플루언서가 다녀온 장소에 비밀댓글을 달며 장소에 대한 힌트를 받으려고 애쓴다. 인스타그램 속 방긋 웃고 있는 모르는 아이 얼굴에 내 아이를 대입해 본다. 우리가 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써가며 숙소를 예약 못해 안달이 나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싶어서가 아닐까. 현실의 행복은 너무 지루하고 따분해서, '행복'이라는 정의를 붙이기엔 남들의 그것과 달라서, 너무 불안하기에.

    그래서 오늘도 "가족의 단란한 행복"이라는 해시태그에 터무니없는 금액을 지불하고 뿌듯함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정작 놀이터에서 조금 더 놀려는 아이는 외면한 채, 작은 네모 속 세상의 낯선 타인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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