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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06. 2023

육아의 치졸함

두더지 게임이 시작된다.

    육아를 하다보면 나의 치졸함에 아연실색할 때가 있는데(적고 보니, 아연실색이란 단어도 너무 가식적이고 불편하다.) 그럴 때마다 '나란 인간은 어째 점점 퇴행하는가'싶다. 적어도 아이보단 나은 어른이어야 할 텐데. 아이와 스파크가 튈 때마다 딱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자아가 소환되서 언성을 높이기 일쑤다. 출산에 대한 후일담을 생생히 전해 들을 시간에 육아 24시 밀착 르포를 봤다면 절대,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비교적 아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건 취업 자기소개서를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 어디 넣을 것인지와 같은 선택지가 아니라 결혼과 출산, 육아를 일 선상에 놨다는 얘긴데 나의 지난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차차 깨닫게 되었다.

육아를 하며 '휘말리는 하루'를 보내다 보면 '피 말리는 하루'가 되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정신을 어딘가로 이주시키고 싶었다. 사이렌 같은 신경질적인 울음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영혼만은 탈출시키고 싶었다. 비록 그곳이 어디일지언정 여기만 아니면 더할 나위 없을 것처럼.

© pixabay


    아이를 갖겠다고 생각 하기전에, 누군가 진흙탕 육아에 대한 솔직한 책 한 권을 선물해 줬다면 어땠을까. 그 귀인을 만났음에 얼마나 고마워 했을지. 아니면 대체 이 사람은 정신이 어떻게 됐길래 깨소금 폴폴 풍기는 새댁에게 이런 암울한 미래 따위를 토스하려나 싶어 거리를 두고 지냈으려나.

그래도 무릇, 셋 이상의 구성원을 꿈꾸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있잖아. 내가 왕년에"와 견줄 임신 출산 무용담 대신, 얼마나 지옥 같은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지 육아 고해성사를 들려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현인이 왜 내 주변에는 없는지)




    육아의 치졸함은 두더지 게임같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다. 그 날것에 대해 적으려 보니 지면 낭비 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자 끄적여보면 대강 이렇다.

가령 양말을 뒤집어 벗어 쇼파 언저리에 올려 놓는다던가, 티비 시청하며 먹은 간식의 작디작은 비닐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가, 해야 하는 학습지를 미루고 미루며 지침 없이 놀다 간신히 앉은 책상에서 의자를 쭉 밀고 몸을 책상에 기대 하릴없이 지우개에 연필심을 꽂는다면... 치졸함이 폭발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는 이게 왜 언성 높은 훈계를 들어야 할 일인지, 대체 내가 조금 전까지 무얼 했길래 엄마가 이토록 화가 난 건지 이해할 수도, 정말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때론 방금 전 무얼 했는지 정말 모르고 있기도 했다.)



    또한 학교에서 아주 사소한 행동에 주의를 받은 날, 하지 말라는 행동이 또 한 번 내 앞에서 보일때면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시큼하게 목구멍을 넘나 들었다.

"엄마가 하지 말랬지! 대체 몇 번 말해!" 한번 화가 난 감정은 컨트롤타워를 잃은 듯 어정쩡하게 우리 둘을 갈라놓았다. 한 번의 행동이 몇 번의 행동처럼 눈엣가시가 되었고, 그런 날은 꼭 회식이 잡힌 남편에 대한 짜증도 아이가 함께 감내해야 했다.

이런 아이와 균열 간 일상이 하나하나 누적되자(때론 지난 일들도 소환) 대체 내 목소리는 그 한계가 어디인지, 나로호 버금가는 발사 추진력을 얻기에 충분했다. 하루의 마무리를 어찌저찌하고 침대에 누워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때면 오늘의 내가 처량하고 한심하고 애처롭고, 다가올 내일이 두려웠다.

© pixabay

    

    육아하기 전 그 관대했던 사람은 어디 갔는가. 모든 별일에도 "별일 아니에요, 괜찮아요."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밥풀 같은 사소함도 '별일'이 되어 버렸다. 내 안에 잔불 가지가 남아 있는지, 불씨가 붙는 순간 용광로같은 화가 치솟아 올라 걷잡을 수 없이 흘러 내렸다. 육아가 이토록 힘든 일이었다면, 앞으로도 힘들 예정이라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 명확한 답을 얻을 수도 없는 이 난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이제 너랑 절교야!라며 눈 흘기고 발을 쿵쿵 구를 유치함을 넘어선 나이가 되어버렸는데. 퇴사할 수도, 휴업 할 수도 없는 '내 아이 잘 키우기'. 이 간단한 명제를 오늘도 증명하지 못한 채 허우덕 대다 맥주 한 캔을 끄집어낸다.

 

가슴 속 용암 덩어리, Calm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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