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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22. 2023

나는 허리 숙였고, 너는 까딱했지.

인사(人事)하다
: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또는 그와 헤어질 때 반가움이나 또는 예의를 갖추기 위한 말을 건네거나 또는 몸짓, 특히 절을 하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인사'를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남과 다를 바 없는, 족보상의 먼 친척 어르신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이 누군인지, 몇 살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떠나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야 했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묻는다.

"엄마, 근데 누구야?"

인사를 하는 사람도, 인사를 받는 사람도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이 형식적인 인사가 과연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다음에 만났을 때 우린 또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슬며시 묻겠지. 

"그래서, 누군데?"


    

    동네 엄마들과 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우리의 친밀한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뒷모습을 보고 말없이 다가가 어깨를 '톡' 치거나 바로 "언제 왔어?"라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이도 있었고, 뒷모습에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색하며 말조심해야 하는 반 엄마들의 경우 적당한 날씨 소재와 아이들 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한 동네 엄마가 보이면 멀리서도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참 애매한 관계는 어쩌다 '동갑'임을 알았을 때였다. 대부분의 경우 존댓말을 하면 되었고, '언니'라는 호칭을 붙이고 대화를 이어가면 되었다. 그런데 동갑일 경우 손을 흔들어야 할지 눈인사를 해야 할지, 말을 놔야 할지 존댓말을 써야 할지 순간의 고민이 이어지다, 고개를 숙이며 손을 흔드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상대방의 쿨한 손 인사를 받으면 '나 지금 뭐한 거지?' 눈을 굴려보는 상황이 연출됐다.



     

    아이를 키우며 웬만한 관계에선 먼저 인사를 했다. 여기서 하는 인사에는 정말 반갑게 안부를 묻는 인사, 간단한 눈맞춤, 알 듯 모를 듯 끄덕이는 묵례 그리고 아이를 방패 삼아 "인사해야지"하는 대타 인사까지. 오고 가는 적당한 인사치레는 실보단 득이 크리라 생각해 내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게 감정 상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같은 유치원에 다니지만, 아이들 나이가 다를 경우 애매모호한 인사치레가 그러했다. 개중에 같은 동에 살기라도 하면 비슷한 시간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에 쭈뼛거림이 같이 탑승하게 됐다. 눈이 안 좋은 건지, 인사하기 싫었던 건지, 매번 내가 먼저 고개를 꾸-벅 하게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항상 고개를 까-딱 하는 게 아니겠는가. 처음에야 '뭐, 좀 쑥스럽고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매번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마지못해, '인사를 허하노라' 싶은 뉘앙스의 고갯짓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뭐야 저 여자."

다음에 또 마주쳤을 때 먼저 인사하지 않자, 눈에 띄게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시작조차 못한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 적어도 나에겐.


<출처: pixabay>

    

    오고 가며 만나는 무수한 인연들에 얼마나 진정성 담은 인사를 건넸을까.


    놀이터 앞을 지날 때마다 요구르트 아주머니께 안부를 건네고, 재활용을 정리하시는 어르신께 쑥스러운 감사를 건넨다. 지인의 아는 사람을 알고 수줍게 인사를 하면 어느새 몇 마디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반갑게 선의를 주고받던 우편집배원과는 제철 채소와 과일, 작은 편의도 오고 가는 사이가 되었다. '일이 바쁘실 텐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어.'하며 목구멍으로만 삼켰던 말을 다시 되뇌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호의가 돌아왔다. 몇 마디 먼저 말했을 뿐인데, '너''내'가 생기고 '우리' 사이에 이어지지 않았던 '반가운 거리'가 생겼다. 진정성이 닿은 인사야말로 우리 관계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점'을 만들어 줬다.


    돌이켜보니 그녀의 까딱임은 어쩌면 으레 주고받는 텅 빈 인사 속에서 우리의 거리가 딱, 그만큼이라는 징표였을 수도 있겠다. 서로가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던 인사였기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표면 치레로서의 인사였기에, 우리는 시작도 전에 그렇게 끝을 맺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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