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로 불리는 내향형 엄마다. 바다가 입학한 작년, 학부모총회라는 것에 겁 없이 발을 들이밀었다. 이전에 사전 조사로 반대표와 녹색 어머니 대표, 책사랑 어머니를 지원해 달라는 선생님의 호소에 조용히 책사랑 어머니를 지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두 자리와는 달리, 책과 아이들을 상대하며 조용히 봉사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래, 맘 편히 도서 봉사를 신청해 놓으면 다른 엄마들이 두 자리를 맡아주시겠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총회를 마치고 각 반으로 이동해 담임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의 간략한 교육과정 발표에 뒤이어 각 자리 대표를 맡아주신 어머니들께 감사 인사가 전해졌다. 우려와는 달리 우리 반은 모두 지원으로 정해졌기에, 담임선생님이 이보다 기쁠 수 없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밝게 웃으셨다.
가장 고역의 시간이 바로 학기 초 대표 자리를 맡아주십사, 요청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새로 맡은 학년 교육과정을 살펴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지만,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던 것은 아마, 아무도 맡기 싫어하는 대표 자리 명단을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리라. 이쯤에서 아이가 원활한 학교생활을 하길 바란다면, 부모로써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의무를 생각해 봐야 한다. 학교에 한 손가락의 도움도 내비치지 않으며, 아이의 옷깃에 묻은 눈길은 하나하나 조사서를 요구하니, 교권이 무너지다 못해 발에 밟히는 세상이다. 그들의 아픈 속사정이 전해지며 교권 회복을 위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지만, 마음까지 치료해 줄 처방이 과연 있긴 할지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참석한 총회는 사전 회의를 통해 교사를 보호하고자 관리자가 직접 나서 학부모 회의를 진행했다. 선생님이 행복해야 결국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가 된다며,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드러냈다. 1, 2학년 두 아이를 모두 맡긴 내향형 엄마는 관리자의 읍소에도 머리 들기가 힘들었고, 제발 누군가가 나서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회의에 들어오기 전 참석자 명단을 작성했지만, 같은 반 부모의 참석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앞에서 1/3지점에 앉은 나로서는, 차마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혹시 우리 반 어머님이 계시나 둘러보지 못했고, 아이들 반이 호명됨과 함께 묶어 놓았어야 할 손이 번쩍 들리며 아이 이름을 대답하고 있었다. 1학년이 끝나고 뒤이어 2학년 반이 호명됐고, 아까의 그 어리숙한 왼쪽 손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며 또 한 번 아이 이름을 말하고 말았다.
바로 후회했다. 총회에 참석하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오지 말 걸.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현실로 복귀하자마자 다이어리에 어지럽게 써진 반대표라는 글자를 바라봤다. 사람을 피하지는 않지만, 굳이 어려운 감투를 나서서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작년 이맘때쯤, 남편은 반대표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처음엔 장난스레 넘겼는데, 이 사람이 자꾸만 입에 올리는 게 아닌가. 절대 하지 않을 터이니, 본인이 하지 않을 거라면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던 나다. 첫 아이 반대표도 거절했던 내가 1, 2학년 연년생 아이의 반대표를 모두 맡아버리다니. 정말 정신이 나갔던 것일까.
지금 와 생각하니, 난 누군가에 도움이 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마흔을 앞둔 시점에도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은 작은 학생의 자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아홉 살 언저리쯤 화장실 청소 당번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대변이 뭍은 변기를 보고 소리 지르며 달아났다. 깨끗이 청소하고 선생님께 점검받아야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모든 아이들이 떠난 변기를 나까지 외면한다면 우리의 귀가 시간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선 냄새나는 변기도 치우면 그만이지 뭐, 라는 다소 대범한 생각과 함께 짜증을 입안에 가두고 변기를 박박 문질렀던 기억이 남는다.
다른 하나는 5학년 언저리, 종업식을 마치고 앞문에 일렬로 서 있는 장면이다. 담임 선생님은 다음 학년을 위해 고쳐야 할 점을 하나하나 말해주셨다. 지각 하지 마라, 친구에게 욕하지 말아라, 정리 정돈에 신경 써라, 등의 말이 지나고 내 차례가 왔다. 벽에 기대 계시던 아담한 여자 선생님은 "미다는 걱정 안 해. 알아서 잘하니깐."이라며 무심한 듯 따뜻한 말을 건네셨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은인이지만, 지금껏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정의 문장'이다. 선생님의 인정이 담긴 두 문장은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할 때마다 찾아 읽게 되는 보물이 되었다.
어쩌면 반대표를 맡은 이유 또한, 그 보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을 바라보는 내게 반대표 역시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 한마디로 인해 용기를 냈고, 내 작은 보탬이 선생님들께 마음의 안도를 전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이 못지않게 선생님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계실 것이다.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못지 않게 "제발, 좋은 학부모님이 계시기를"이라며 평온한 일 년을 기대할 것이다. 차가운 교실 속 각종 기안과 결재에 치여 시린 손가락을 주무르고 계실 선생님께 내향형 엄마의 조용한 응원이 온기로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이로써 교실 모두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번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