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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24. 2024

이게 화낼 일인가.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지금이 적당한가. 이 타이밍인가.

'이게 화낼 일인가. 화를 내어도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꼭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화를 내기 전 생각해 본다. 단순한 몇 마디가 가져올 나비효과를.

지금은 일요일 오전, 앞으로 만 하루를 보내야 한다. 누구 하나 집 밖을 나갈 계획이 없으며, 화를 낸다면 모두 그 공기를 나눠 마셔야 한다. 그렇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화를 낼 말한 일인지.

사실, 생각이 여기에 미쳤다면 그건 이미 화가 났다는 일일 테고, 분명 얼굴에도 티가 났으리라. 곰곰이 생각하던 눈은 좌우를 오가며 잠시 분위기를 살필 테고, 입술은 앙다물다 못해 무릇 튀어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몸이 이미 내뿜고 있는 화의 기운을 단지 머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척' 할 뿐이다. 화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내 이기적 유전자는 어디서 왔을까. 어느 핏줄을 타고 왔길래, 이렇게 강경하게 살아남아 온몸에 각인 된 것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이기심은 처음엔 당연하게, 두 번째엔 정당했나 하는 의구심으로, 세 번째엔 그럼에도 참았어야 했다는 죄책감으로 느껴졌다.

    토요일 오전은 첫째 아이의 운동 스케줄로 반나절이 지나간다. 아빠와 아이 둘이 다녀오는 코스가 대부분이지만, 그렇기에 둘째와 나 역시 집에 메인 몸이 돼버린다. 애매하게 2시에 마치는 아이를 위해, 우리는 오전 시간 대부분을 집 안 정리와 보드게임, 티비 시청에 할애하고 날이 좋으면 도서관에 다녀오거나 줄넘기를 한다. 주말을 모두 바쁘게 보내다 월요일을 맞으면 쉬지 못하고 7일의 월요일을 보낸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하루 중 반나절 정도는 유유자적, 때론 하릴없이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속되자, 단 한 사람을 위해 남은 사람의 스케줄이 저당 잡히는 점이 슬슬 짜증을 동반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차를 갖고 나간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상대적으로 주중의 반복된 삶을 주말에도 지속하는 우리는 무료했다. 치대는 아이와 둘이 남아 똑같이 반복되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권태로웠고, 무미건조했다. 첫째의 스케줄에 동행하기로 하고, 잠시 빠져나와 혼자 커피숍을 향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핸드폰을 충전하고 책을 펼치려는 그때, 남편의 목소리와 함께 둘째가 보였다. "애가 엄마 보고 싶대."




    왜 또 엄마가 보고 싶을까. 오전 시간 내내, 네 기분에 맞춰 내 한 시간 치 최선을 다했다. 무릎에 앉혀 같이 책을 보고, 게임을 하고, 눈을 맞추고, 춤을 추며. 단란한 오전의 눈 맞춤에 하루치 애정을 쏟아부었고, 그것은 일종의 거래와 같았다. 이제 우리, 각자 시간을 갖자.

가족이 우선인 남편과 다르게 자꾸만 가족 안에서 내 시간을 애써 찾으려 했다.

'몸이 안 좋으니 좀 누워있을게.'

'엄마, 책 좀 볼게.'

'커피 좀 마시고 있을게.'

자꾸만 4인의 틀 안에 나만의 독방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나 잠깐만 들어갔다 올게, 라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다. 남편을 애정하는 마음과도 별개고. 그냥 잠시, 좀 온전히 쉼을 갖고 싶었다. 그래야만 몸이 충전되는 듯했다. 슬슬 올라오려는 불편한 감정을 다시 토닥이며 아래로 누를 수 있었다. '혼자 쉬었잖아, 다들 노력하고 있잖아, 배려하고 있잖아.' 이기적 유전자에 말을 걸었다. 충족될 때도 있었고,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는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마음을 찔러가며 새침하게 묻고 있었다. '봐봐, 사실 괜찮지 않잖아. 왜 괜찮다 그래? 왜 착한척하고 있어?' 그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마음 또한 나였으므로. 어떻게든 좀 쉬고 싶었다. '내 할 일은 다한 거 같은데, 아직도 뭘 해야 하나.' 사실 남편한테 말할 순 없었다. 회사에서 지친 남편이 애써 힘듦을 표현 하지 않고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을 알기에 혼자만 힘들다고 할 수 없었다. 서로의 어깨에 다정한 눈길만 건넸다. 당연하게 요구하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온몸은 축축 처진 채 말하고 있었다. '내 하루가 얼마나 동동거리는 지, 이 모습을 보니 알겠지?'

 



    각자의 고단함은 말하지 않고서야, 아니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야 알 수가 없다. 출근길,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계단 속에서 양말에 땀이 차는지,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가슴의 맥박은 몇 bpm 인지. 상사의 업무 평가가 몇 데시벨의 목소리로 들리는지. 점심 식사 속 쌀알의 무성의한 낱알은 몇 개인지. 하루 종일 울리는 벨소리의 간격은 어떠한지. 내가 그가 아니고서야 알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일 테지.

자의로 일어난 새벽의 고단함이 하루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600초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집안일을 해치울 수 있는지. 무료하고 보상 없는 적적한 공기 속에서 버티며 있는 시간의 속도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문제집의 페이지가 추가될수록 아이와 내가 맺는 관계에 어울리는 함수는 무엇인지. 서로의 시공간 속에 치여 살다가 하루 중 몇 분의 눈 맞춤과 인사로 마무리하고 다시 각자의 시공간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기에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 세계에서는 화가 날 일인데, 이게 네 세계에서도 그러한 일이니? 그렇다면 내가, 화를 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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