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가르쳤었다. 알량한 지식을, 사실은 책에 다 나와 있는 지식을 나만 알고 있는 양 침을 튀겨가면서 한 시간 내내 떠들었었다. 학생들에게 배움이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가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아이들은 많이 알게 되리라 생각하였다. 많은 것들을 열심히 가르쳐주는 것이 교사인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침 튀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었다. 지금 생각하니 학생들의 ‘앎’은 조금치만 일어났고 학생보다는 내가 많이 성장했던 시간이었다.
생활지도도 열심히(?) 하였다. 인간은 자극을 받아야 하고 그 자극으로 회초리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었다.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을 죄라 생각하여 손바닥을 때리고 종아리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었다. 언어폭력은 폭력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학생들의 작은 잘못이나 실수에도 마음에 상처 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회초리를 맞고 욕을 먹은 아이들이 매를 맞고 조용해지고 다소곳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능력 있는 교사라 생각하여 대견해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는데 그때는 왜 부끄러움이 아닌 뿌듯함이고 자랑스러움이었는지?
교단을 떠난 후에야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보처럼. 국어사전에는 ‘인간 심신의 모든 능력을 발육시키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이라고 나와 있었다. 늦게서야 ‘배움’보다 ‘익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교사의 가르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생의 의문 품음과 탐구심과 익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다림과 용서와 부드러움과 솔선수범, 그리고 행동으로 시범 보이기가 옳고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퇴직 5~6년 전부터는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소리 지르며 화내지도 않았다. 작은 실수에는 미소로, 큰 실수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굳이 야단치지 않고 화내지 않아도 잘못을 깨닫고 멋쩍어하며 행동을 바로잡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체벌과 화냄으로는 아이들 마음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노를 가져와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다림과 용서와 관심과 부드러움이 아이들의 마음을 바꾸고 결국은 행동까지 바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