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례하고 있는데 복도 창문에서 누군가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졸업생이었다. 종례를 마치고 나가 보니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었다. 상담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세 명의 이름은 생각나는데 한 명의 제자 이름은 아무리 기억해 내려해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3학년 담임이었는데…… ‘제 이름 아세요?’라고 물어볼까 봐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잠깐만’이라 해놓고서 교무실로 가서 컴퓨터 검색창에 3학년 9반을 입력하였다. 다행히 정철수라는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졸업한 지 15년이 넘은 3학년 6반 제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모두 기억할 수 있는데 3년도 지나지 않은 학생들의 이름은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개 갸우뚱하다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3학년 6반 아이들은 1, 2, 3학년을 가르쳤지만 3학년 9반 아이들은 1년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3년 내내 2시간씩 수업을 하면서 만나 왔기에 10년이 지나서도 대다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지만 1년만 가르쳤기에 3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기억할 수 없었던 거다. 열정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3학년 6반을 담임할 때는 열정이 컸지만 3학년 9반 담임일 때에는 열정이 사그라들었던 것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식이가 과외하고 있노라 자랑하려다가 움찔하였다. 사교육 하지 말라 강조하였고, 대학에 가서도 과외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내 말을 기억해 낸 듯하였다.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나무랄 수 없었다. 영식이의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단치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는 제자가 고마웠기 때문이었고, 겨우 4등급과 5등급을 넘나들었던 제자가 과외하고 있음이 대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과외비로 얼마를 받느냐는 질문에 중학교 2학년 생인데 수학과 과학을 90분씩 4번 가르치고 50만 원 받는다면서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러면서 성적이 오르지 않아 걱정이라는 이야기,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하다는 이야기, 열심히 설명해 주었음에도 다음에 물어보면 몰라서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수가 자신도 고등학교 때에 과외받아 보았는데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고 하자 민호는 웃으면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은 나쁜 놈이라 공격하였다. 철수는 그때 선생님 말씀 듣고 사교육 그만두고 자기주도학습에 열중하였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후회스럽다고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 말씀이 다 맞는데 그때는 왜 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조카들에게는 절대 사교육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영식이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분위기를 바꿔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식아, 네가 많이 가르쳐준다고 그 아이가 많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알지?”
“알긴 하는데 그래도 가르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 하는데……. 저, 그 과외비 없으면 생활이 힘들어요. 그 과외 끊기면 안 돼요.”
“그래,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것이잖아. 과외를 계속할 방법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야.”
“……”
“네가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니, 아니면 학생의 성적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니?”
“둘 다요.”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학생의 성적 올라가는 것이겠지요.”
“학생의 성적을 올리려면 잘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 스스로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알고 있긴 한데요…….”
“선생님이 잘 알고 있는 돈 잘 버는 수학 학원 원장님이 있는데, 그 원장님의 학원에는 칠판이 없어. 가르쳐주지 않고 학생에게 문제를 주고 풀도록 한다더구나. 학생은 학원에 와서 배우지는 않고 주어진 문제만 풀고 돌아간단다. 학생이 질문하면 원장님이 답해주기도 하지만 단 1분도 배우지 않고 돌아가는 날도 있다고 하더라. 질문에 답해줄 때도 처음부터 답이 나올 때까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만 알려주고 스스로 풀도록 한다고 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지 않고 중간중간 조금씩만 도와준다는 말이지. 성적이 올라갈까? 올라가지 않을까? 당연히 올라가지. 그것도 많이. 선생님께 배워서 성적이 올라간 게 아니라 스스로 문제랑 씨름했기 때문에 성적이 올라간 거라는 이야기야. 재미있지? 선생에게 배우지 않아야 성적이 올라가는 이상한 법칙.”
“…….”
“그래도 돈은 많이 받는단다. 왜? 성적이 올라가니까.”
“많이 헷갈리는데요, 선생님!”
“헷갈리지 않아도 돼. 선생님은 지금,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익히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길 하고 있으니까.”
“선생님 말씀이 맞아.”
카이스트 다니다가 한 학기 쉬고 싶어서 휴학하고 있다는 세호였다. 지난 학기에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었었는데, 들을 때에는 감탄도 하고 이해하는 것 같았는데 다음 날이면 강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가 책을 보고 연구한 내용이나 질문을 통해서 얻은 지식은 며칠이 지나도 생생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였다.
“저도 알긴 알아요. 그렇지만 학생과 학생의 부모가 잘 가르쳐주기를 원하고, 학생은 스스로 해볼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고……, 방법이 없잖아요. 저도 무척 힘들어요. 돈 때문에 하긴 하지만…… 방법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학생이 공부할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성적 올려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공부할 의지가 없는 학생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 올릴 수 없으니 당장 과외 집어치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과외를 해야만 하는 영식이의 처지를 알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