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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Mar 13. 2024

공부는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버지와 함께 모내기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넷이나 다섯 줄기씩 심으라 하시는데도 나는 아버지 몰래 여섯이나 일곱 심지어는 여덟 줄기씩 심었고, 못줄에 맞추어 심으라는 말씀을 어기고 못줄 표시 네 개에 다섯 번을 심었습니다. 비료를 많이 주면 안 된다는 말씀을 어기고 몰래 듬뿍 뿌려 주었습니다. 많이 심고 조밀하게 심고 비료를 많이 주면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가을에 아버지께 큰소리치겠노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제가 심은 벼는 키가 자라지 않았고, 열매도 충실하게 여물지 못했으며, 비료를 많이 준 곳의 벼는 말라비틀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도 저는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다음 해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리석은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고, 너무 열심히 뛰어서 중간에 주저앉아 버렸으며, 지나친 친절로 오해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말 한 마디 덧붙여서 일을 망치기도 하고, 과속을 하다가 범칙금 고지서를 받았으며 대형 교통사고를 낼 뻔도 하였습니다. 쉰 살이 넘어 흰머리가 내려앉은 뒤에야 중용中庸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힘이 빠져 가는 나이가 되어서야 과유불급過猶不及, 교왕과직矯枉過直, 교각살우矯角殺牛(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 잘못된 점을 고치려다가 그 방법이나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침)가 진리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놀고 쉬고 공부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온 다는 평범한 진리, 과유불급의 진리를 교육 현장에서 자주 확인합니다. 쫓기듯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린 아이보다 적당히 휴식도 취하면서 공부한 아이가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학원 수업과 과외·숙제에 정신없이 쫓기던 학생이 시험이 끝난 뒤에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여유를 가지고 꾸준히 자기주도학습을 한 아이가 좋은 성적표를 받고 미소 짓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이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못한 결과를 낳듯, 많이 ‘배우는 것’이 오히려 성적 하락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너무 많이 확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당수 아이들이 사교육과 인터넷 강의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못하여 교실에서 자고 졸기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사교육과 인터넷 강의 때문에 자기 공부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습·복습을 하지 못하여 공부다운 공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선생이 시켜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께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내용을 배웠지만 학생 개개인의 실력이 제각각인 것만 보아도 공부는 선생이 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해야 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공부의 주체를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잘 가르치는 선생님의 훌륭한 강의를 들어야만 실력을 키워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선생님의 실력과 학생의 실력향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있다고 해도 극히 미약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실력 향상을 위해 중요하고 필

요한 것은 선생님의 실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학생의 의지와 노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후 학습법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공부는 학생이 하는 것이고 책으로 하는 것이다. 배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익힘이 중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선생이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학생이 하는 것입니다. 책을 스승 삼아서 학생이 스스로 해야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혼자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실력을 키워 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다만 방향을 제시하고 당근과 채찍을 들고 지켜봐 주고, 격려해 주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공부의 주체는 학생이고 선생님은 안내자요 도움자입니다.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고 못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잘 가르치는 선생님께 배워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공부는 책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꼼꼼하게 해야 잘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강의 등 미디어 매체의 도움을 받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실력을 쌓을 수는 없습니다. 책을 보고, 깊이 생각하며, 실력에 맞게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사전이나 참고서 등을 활용해야 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확실하게 알아 가면서 천천히 해 나가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인터넷 강의가 필요 없는 이유는 배움은 수업 시간으로 충분하기 때문이고, 인터넷 강의를 듣다 보면 생각할 시간, 예습 복습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공부도 타고난 재주가 있어야 잘할 수 있고,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음악에 재주가 없노라 말하고 운동에는 소질이 없노라 말하면서도 공부에 재주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음은 이상하지 않은가요? 공부를 꼭 잘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은 의무지만 대학 입학은 의무가 아닙니다. 학문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라면 국가가 나서서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마땅하지만, 재능도 흥미도 없는 아이에게 반드시 대학에 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불행을 낳을 뿐입니다.

 잘 가르치는 선생에게 배우기만 하면 실력이 일취월장할 거라는 믿음으로 엄청난 투자를 쏟는 것은 잘못입니다. 공부는 선생이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공부도 재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삶의 고통이 상당히 줄어들 거라고 오늘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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