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도시로 가는 이유, 비에이
대망의 그날이다.
삿포로에 온 이유, ‘비에이 투어’.
비에이 투어란! 삿포로역에서 눈의 도시 ‘비에이’로 이동해, 흰 수염 폭포 -패치워크 로드 -크리스마스 나무 -비에이역 -탁신관 자작나무 숲을 거쳐 다시 삿포로로 돌아오는 하루 일정의 투어다.
우리는 렌터카로 눈길을 운전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기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단체 버스 투어를 선택했다.
비에이까지는 꽤 먼 거리다.
눈길 운전까지 고려하면 새벽 7시 30분 출발, 저녁 6시 도착 예정이라는 살짝 가혹한 일정.
‘버스에서 먹을 요깃거리를 꼭 사가라’는 꿀팁을 철저히 따랐다.
키리모찌 롤 하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조합이면 충분했다.
참고로 버스에는 한국인이거나 한국어가 능통한 가이드가 동행하므로 설명과 일정 관리 모두 믿고 맡길 수 있다.
삿포로에는 눈이 거의 없던 터라 ‘몇 시간 달린다고 갑자기 눈이 올까?’ 싶었는데, 그 생각은 딱 두 시간 만에 틀렸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차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더 달려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
흰 수염 폭포.
도카치다케 화산지대에서 나온 지하수가 암반 틈 사이로 솟아 떨어지는데, 특정 각도와 지형 때문에 물빛이 유난히 푸르게 보인다고 한다.
화산수라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흘러내려, 하얀 물줄기가 수염처럼 보여 ‘흰 수염 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버스에서 내려 마주한 풍경은 말 그대로였다.
“아, 나 지금 눈 속에 있구나.”
퐁실퐁실한 눈이 하얀, 파랑 자판기 위에 마치 모카커피 위 생크림처럼 얹혀 있고, 여기저기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둔 것 같은 작은 눈사람들.
조금 더 걸어가자, 그 유명한 흰 수염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꽁꽁 얼어붙은 세상 한가운데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폭포라니...!
생각보다 훨씬 영롱하게 푸른 물빛에 괜히 숨을 한 번 고르게 된다.
다만, 폭포를 바라보는 다리의 난간이 낮다.
사진 찍을 때는 꼭 조심하시길.
신비로운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한 시간가량 이동해
SNS에서 수도 없이 봤던 그곳, **‘크리스마스 나무’**에 도착했다.
이 나무가 서 있는 땅은 개인 소유지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나무를 베려했던 적도 있었고,
비에이 측에서 말려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가이드님이 전해주셨다.
하얀 설원 위에 단 한 그루,
초록빛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서 있는 나무.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푹, 푹, 걸어가 첫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현실이라기보다 CG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어디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잠시, 이곳은 이상하게도 어디서 찍어도 다 ‘메인 샷’처럼 나온다.
배경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내가 예쁘게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웃프게도 그게 제일 어려웠다.
주어진 시간은 약 20분.
빠르게 사진을 찍고, 허기진 배를 부여잡은 채 비에이역으로 이동했다.
연말이라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았고, 웨이팅으로 시간을 날릴 수 있다며 가이드님은 미리 도시락 주문을 받아주셨다.
우린 버스 안에서 돼지고기 덮밥을 먹고 나서야 비에이역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돼지고기 덮밥은 적당히 짭짤하고 달달해서 춥고 지친 몸에 딱 맞았고, 내 기준 삿포로 음식 1등이었다.
그리고 비에이역.
여긴 진짜, 무조건 가야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들어온 것 같은 색감의 기차 표지판, 소복소복 내려앉는 눈,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차역과 횡단보도.
도로 양옆으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과 생각보다 덜 추운 날씨 덕분에 머리가 다 젖어도 마냥 행복했다.
참, 쌓인 눈 위에 냅다 누워보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눈은 생각보다… 단단하다.(글쓴이가 직접 검증함)
약 40분간 비에이를 즐긴 뒤 오늘의 마지막 코스, 탁신관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탁신관은 비에이를 대표하는 풍경 사진작가인 마에다 신조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며, 입장료는 없고, 자유롭게 관람 가능하다.
(굿즈 가격이 사악한 건 조용히 덮자)
이곳의 눈은 정말, 원 없이 내렸다.
약 20분 정도 걸리는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예전에 배용준 배우가 출연했던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장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하늘 높이 뻗은 자작나무에 하얀 솜처럼 걸린 눈들이 오늘 여행의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마지막 코스를 마치고 나니 많이 지쳤다:))
푹푹 빠지는 눈길, 젖어버린 신발과 패딩, 슬슬 올라오는 오한.
… 나이 탓은 아니길 바란다.
눈 이슈로 인해 원래 6시 도착 예정이던 삿포로역엔
8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파르페도, 라면거리도 포기하고 예약 가능한 근처 이자카야에서 간단한 저녁과 술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오타루로 향할 예정이므로, 피곤한 몸을 핑계 삼아 아점을 먹고 느긋하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채 침대에 몸을 맡겼다.
눈의 계절에 눈에 파묻히는 상상, 다들 한 번쯤 해보지 않는가.
어릴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눈밭에 뒹굴고 싶은 마음.
그 낭만은 아직 늦지 않았다.
삿포로, 그리고 비에이.
눈의 도시로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
— 삿포로에서의 둘째 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