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는 아직 나를 모른다
2025.12.29
04:00 a.m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는데도 눈이 떠졌다.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지는 날은, 대개 마음이 먼저 떠나 있는 날이다.
몸은 아직 방 안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삿포로로 가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삿포로로 3박 4일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연말을 통째로 건너,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여행.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새벽 공기 속에 고여 있었고, 두툼한 외투에 몸을 밀어 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 시간대의 공항은 늘 묘하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과 기대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이동한다.
07:40 a.m
일본 신치토세공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았다.
이륙의 설렘을 음미할 틈도 없이 새벽에 일어난 탓이었을까... 의식은 곧바로 꺼졌다.
약 세 시간.
기절에 가까운 잠에서 깼을 때, 창밖에는 일본의 북해도가 펼쳐져 있었다.
아, 도착했구나!
말로만 듣던 그곳에,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도착해 버렸다.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역까지는 JR 열차로 한 시간이 걸린다.
차창 밖 풍경은 서울과 닮아 있었지만, 속도는 훨씬 느렸고 공기는 정돈되어 있었다.
삿포로는 구조가 단순한 도시다.
삿포로역–오도리공원–스스키노 거리, 메인 동선이 거의 일자로 이어진다.
그래서 숙소는 3박 모두 같은 호텔로 삿포로역 근처로 정했다.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행의 피로는 이미 반쯤 줄어든 기분이다.
삿포로는 지하도로가 잘 되어 있어 캐리어를 끌기엔 좋다지만, 길을 잘못 들면 미로처럼 헤매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눈 덮인 거리에서 캐리어를 끌며 길을 잃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지쳤기에 역에서 근접한 곳에서 묵기로 했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꽤 현명했다.
4개월 만의 비행기, 그리고 5년 만의 일본.
설렘은 충분했고, 도착한 공항은 여전히 일본 답게 깨끗하고 신사적이었다.
사람들은 활기찼으나 민폐를 끼치지 않는 수준에서의 기분 좋은 들뜸이었고, 아기자기하게 정돈된 진열대의 물품과 깨끗한 공항.
그 익숙한 분위기가 괜히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눈의 도시’ 삿포로.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꽁꽁 방한용품으로 무장하고, 나름의 멋까지 더해 도착했지만 막상 맞이한 도시는 놀랍도록 말끔했다.
눈은 없었고, 도로는 정갈했으며 바람마저 한국보다 덜 매서웠다.
눈에 뭉개지고 싶은 마음으로 왔기에,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실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순간마다 긍정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이다.
“내일은 눈이 오겠지.”
그 말 한마디로 마음을 접고, 숙소에 짐을 맡긴 뒤 미리 검색해 둔 카레 수프집으로 향했다.
삿포로에 오면 꼭 먹어야 할 음식들이 있다.
칭기즈칸, 해산물, 털게, 그리고 카레 수프.
여행이란 원래, 먹고 싶은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환율 하락 덕분에 100엔에 1,000원 정도로 계산하며 나름 넉넉하게 예산을 잡았음에도 체감 물가는 한국보다 확실히 비쌌다.
메뉴 하나당 자연스럽게 얹히는 1,000원, 2,000원.
게다가 일본 음식 특유의 소박한 양은 1인 1 주문으로 끝나지 않게 만들었다.
카레 하나에 구운 야채를 추가하고, 치킨을 얹고, 공깃밥을 더하니 어느새 2만 원이 훌쩍 넘어버린 한 접시.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생맥주까지 더해 인당 25,000원의 첫 끼가 완성됐다.
여행지에서의 첫 끼는 늘 음식보다 들뜬 마음을 먼저 먹는다.
‘수프’라는 이름답게 우리가 알던 카레보다 훨씬 묽은 맛이었고, 꾸덕한 카레를 좋아하는 내 취향엔 조금 아쉬웠으나, '경험했으니 됐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생맥주 첫 모금을 넘기는 순간, 말해 뭐 해!
아, 여행이 시작됐구나 싶은 감각이 늦게나마 몸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근처의 구글 평점 4.8에 육박하는 커피집으로 향했다.
대용량 커피에 익숙해진 탓인지 종이컵만 한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는 신맛이 강해 내 입맛엔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건 커피 맛이 아니라, 직원들의 태도였다.
너무나도 살갑고 친절하던 직원분들 덕에 그날의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친절을 마신 느낌이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들어간 숙소는 작고, 깨끗하고, 간결했다.
잠깐 눈만 붙이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누웠다, 눈을 뜨니 어느새 저녁 7시.
여행의 피로는 생각보다 깊었다.
기모 트레이닝 세트로 갈아입고 낮의 기온을 떠올리며 거리로 나섰다가 곧바로 판단 미스를 깨달았다.
저녁의 삿포로는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진눈깨비가 섞인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고, '금방 식당 들어가니까 괜찮아.'라는 말은 몇 분 만에 무너졌다.
저녁은 미리 점찍어둔 스스키노 거리의 야키토리집!
오도리공원을 지나쳐야 하기에 공원도 잠깐 들르기로 했다.
공원까지 약 1.3km 15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눈과 바람 때문인지 체감상 시간은 훨씬 길게 늘어졌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오도리공원의 TV 타워는 빨강과 파랑이 번갈아 빛나며 도시의 중심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전망대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삿포로 사람들은 새해를 이곳에서 맞이한다고 한다.
큰 전광판에 표시되는 시간을 보며 함께 카운트다운을 한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자연스럽게 1월 1일은 이곳에서 맞이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원을 지나 스스키노 거리 특유의 활기가 시작됐다.
네온사인, 전광판, 호객하는 사람들, 술집과 식당, 그리고 메가쇼핑몰 '돈키호테'까지.
이 도시의 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는 듯했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리 봐둔 야키토리집에서는 예약 없이는 마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이후로 들어간 식당들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열 번의 거절 끝에 남은 건 배고픔보다 초조함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무엇이든 저녁을 찾는 사람이었다.
‘여기마저 안 되면 편의점이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들어간 곳은 다찌 형식의 오코노미야끼집이었다.
오! 마침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순간의 안도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벅찼고, 이 도시가 아주 잠깐 나를 받아준 것 같았다.
베이직 오코노미야끼와 오징어 오코노미야끼, 그리고 생맥주.
눈앞의 철판에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그대로 건네주는 다찌가 추운 날 밖에서 헤맨 우리에게 주는 묘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철판 앞에 앉는 순간, 오늘 하루가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퐁실한 계란과 가쓰오부시의 고소함.
작은 사이즈 탓에 1인당 세 개씩은 먹었고 술도 자연스럽게 늘어 계산은 10만 원에 가까워졌지만, 오늘만큼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배가 차니, 마음도 늦게나마 제자리를 찾았다.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눈은 여전히 가볍게 흩날렸고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지만 배가 차서인지, 겨우 자리를 얻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낮보다 마음은 훨씬 따뜻해져 있었다.
여행의 첫날은 늘 그렇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풍경에 실망하고, 생각보다 버거운 날씨에 주눅 들고, 사소한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는 순간 ‘괜히 왔나’ 싶은 마음이 스친다.
그런데도 결국 하루는 흘러가고, 어찌 됐든 나는 지금 삿포로에 있다.
눈을 맞고, 길을 걷고, 거절당하고, 그러다 우연히 자리를 얻어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그 평범한 과정이 이 도시에 나를 조금씩 적응시키고 있었다.
캔맥주를 사 들고 들어온 우리는 뚜껑조차 따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고, 아마도 그건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안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해는 아직 오지 않았고, 눈도 아직 본격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첫째 날의 삿포로는 이렇게 조용히, 조금은 거칠게 우리와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행의 첫날이 유독 오래 남는 이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 삿포로에서의 첫째 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