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 인턴으로 요르단에서 일하다
"우리는 일로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윈스턴 처칠
중위 때 나는 군 추천으로 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KDI국제정책대학원에 야간으로 다니면서 서울 쪽에 당시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번씩 다니게 되었다. 제대 1년 전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중동에서는 IS라는 테러조직이 시리아를 휩쓸고 있었고 대량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나는 평소 사람이 가진 것들은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타고난 운이 많이 작용했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을 예를 들면 일단 수많은 나라 중에 아프리카나 전쟁 중인 시리아에서 태어나지 않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운, 그 중에 중산층에 태어나 자녀에게 헌신적인 부모님을 만난 운, 그리고 내가 가진 기질들 또한 운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통해 얻은 것들을 사회와 공동체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 멀리 중동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받은 운 통해 얻은 것들을 나눠주고 싶었다.
나는 젊은 혈기와 중동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시리아 난민들을 돕고 싶다는 일념을 가지고 코이카 요르단 사무소 인턴으로 지원하였다. 코이카는 한국어로 한국국제협력단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외교부 산하의 기관으로 저개발국가의 원조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보통 내 동기들은 군 제대 후 대기업 정규직에 지원하였고 나 또한 지원하였지만 서류를 합격하고 난 후 면접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다시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고 후에 소개할 것이지만 옥스포드 석사과정에 지원했기 때문에 만약 합격한다면 9월에 입학하는데 8개월만 회사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6개월인 인턴 과정에 지원한 이유도 있었다. 군에 있는 동안 코이카 인턴에 합격하기 위해 개발협력 자격증도 공부하여 합격하여 가산점을 얻을 수 있었고 서류 전형과 면접을 무난히 통과하여 요르단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중동이란 낯선 땅에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들떳다. 그리고 요르단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요르단에 도착하다
요르단 행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위해 아부다비에서 잠시 내렸다. 처음 온 중동이라 매우 낯설었는데 평소 티비에서나 보던 터번을 두 아랍사람들을 보자 무서웠다. 아무래도 내 안에 아직 아랍은 테러와 연관되어 있다는 나쁜 고정관념이 있었나보다. 후에 이곳에서 일하면서 미디어가 얼만큼 고정관념을 만드는지 느끼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다 같는 사람이다. 직접 겪기 전에는 외모나 미디어를 보면서 절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환승 이후에 요르단 공항에 도착하자 코이카 사무소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사무소로 가는 길에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던 세상과 완전 다른 처음보는 세상이 펼쳐져있었다.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광야 위에 하얗고 흙색의 집들이 보였다. 길거리에는 양들이 돌아다니고 여자들은 히잡을 쓰고 남자들은 우리가 보던 터번을 두른 이슬람 복장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요르단의 첫 인상은 한편으로는 무서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신기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소장님과 직원 분들의 인상이 좋았다. 다들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셨고 요르단의
한국 식당에서 첫 웰컴 식사를 하였다. 숙소 또한 한국식당에서 하숙도 겸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며칠간 살면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다행히 회사 근처에 넓은 투룸 집을 구할 수 있었고 요르단 적응은 빠르게 마쳤다.
코이카 요르단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하다
요르단 사무소에서는 직원이 몇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인턴이지만 바로 여러 프로그램에 투입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요르단 사람들을 위해 공공병원과 기술 학교 등을 지어주고 있었고 나는 Assistant manager로서 그 프로그램들을 도왔다. 때로는 요르단 정부 인사들을 만나고 장관 회의에도 함께 참석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르단은 사실 우리에게 원조를 받기에는 이미 2017년 당시 GDP가 만달러에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정말 요르단이 가난해서기보다는 중동 진출의 외교적 전략으로 요르단은 지원하는 듯 했다. 그래서 정말 도움을 필요로하는 시리아 난민들을 만나고 싶었다.
자타리 시리아 난민 캠프의 아이들을 위해 일하다
어느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한국의 전자 의수를 만드는 스타트업을 돕는 일이었다. 나는 소장님께 이 일을 맡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다행히 이 일을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곧 한국에서 해당 스타트업의 대표님과 직원분이 요르단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요르단 시리아 사이에 있는 시리아 난민 캠프 중 가장 큰 캠프인 자타리 캠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목표는 전쟁으로 팔을 잃은 시리아 난민들을 찾아서 무료로 전자의수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자타리 캠프로 들어가자 눈앞에 컨테이너 같은 집들이 펼쳐졌다.
2017년 시리아 난민 캠프인 자타리 캠프에서, 맨 왼쪽이 나 이다.
환경은 열악해 보였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데 옆에 수십명의 유치원생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지나갔다. 아마 임시로 지어진 학교에 다니는 듯 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정말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도 6.25를 겪으면서 그리고 나라를 복구해나가는 와중에 수많은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나. 우리나라가 시리아 난민 만큼은 정말 신경을 잘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전쟁 중의 순수한 어린 아이들의 목숨과 행복만은 전 세계가 함께 지켜야 된다.
차를 타고 가다가 난민 캠프 안에 있는 병원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우리는 전쟁 중에 팔을 잃은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고 청소년들도 있었다. 대부분 전쟁중에 포탄을 맞거나 집이 무너지면서 팔을 잃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자의수를 만들어 주었고 그들은 전자의수를 몸에 설치하고 손이 움직이자 웃음을 지었다. 내 생애 가장 보기 좋았고 소중했던 미소였다.
리더란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픔에도 공감해야 한다
그 후로 우리는 시리아 난민 고아 아이들을 초대하여 하루동안 그 아이들과 재밌게 노는 프로그램들도 하면서 시리아 난민 아이들을 위로했다. 이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경험을 하였다. 세상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었고 그들을 위해 일했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우리는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픔에도 귀를 귀울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앞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리더는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픔에도 공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시리아난민 #시리아 #요르단 #자타리캠프 #난민캠프